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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도시와 와인, 잔이 머문 풍경들’

by 콩코드


와인은 병 속에 갇혀 있는 술이 아닙니다. 그 병이 열리는 순간, 그 잔이 놓인 테이블, 그 테이블이 놓인 도시, 그리고 그 도시의 기온과 공기, 언어, 음악까지 모든 것이 와인의 일부가 됩니다. 와인은 그 장소의 기억을 마시게 하는 술입니다.


파리의 오후, 몽마르트 언덕 아래 작은 비스트로. 와인 리스트를 건네받고, 낯선 단어들 사이에서 모험처럼 하나를 고릅니다. 그날 내 선택은, 루아르 밸리의 상쾌한 소비뇽 블랑. 가볍게 입을 적시는 그 첫 모금 속에서 프랑스의 햇살과 바람이 함께 들어오는 듯했죠. 누군가에게 그 와인은 ‘화이트 와인’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파리의 오후가 되어 남습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언덕 위 작은 와이너리. 저녁 노을이 물든 풍경 속에서 테이블마다 와인이 한 병씩 놓여 있고, 가볍게 부는 바람에 잔 속의 빛이 흔들립니다. 그날은 특별한 음식이 아니었어요. 단지 올리브오일을 두른 빵, 생햄 몇 조각, 그리고 와이너리 가족들이 만든 로제 와인 한 잔. 그 잔을 마시며 바라본 풍경, 붉게 타오르던 언덕의 실루엣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와인은 도시의 표정을 닮습니다.


• 빈(Vienna)의 커피하우스 옆에서 마시는 스파클링 와인은 어딘가 클래식하고 단정하고,

• 바르셀로나의 야시장 골목에서 마신 템프라니요는 자유롭고 거칠며,

• 도쿄의 바에서 마신 보르도 한 잔은 조용한 긴장감과 세련된 균형을 느끼게 합니다.


그곳의 소음, 밤공기, 언어의 리듬, 함께한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와인의 풍미를 결정짓는 향이 됩니다. 도시를 마신다는 건, 와인을 통해 그곳을 다시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는 도시가 그리워 와인을 마십니다. 리옹의 비좁은 골목을 생각하며 코트 뒤 론을 따르고, 나파밸리의 햇살을 떠올리며 진판델을 고릅니다. 그건 단순한 미각의 만족이 아니라 그곳의 시간과 감정, 머문 기억을 다시 꺼내보는 일입니다. 그래서 집 안에 와인 한 병이 있다는 건, 어느 도시로든 훌쩍 떠날 수 있는 티켓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그 병이 열리는 순간, 나는 지금 파리에, 토스카나에, 산티아고에 도착합니다.


어쩌면 와인은 술이 아니라 풍경의 저장소인지도 모릅니다. 눈으로는 담지 못한 장면들, 말로 다 전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와인은 천천히, 깊이 저장하고 있다가 언제든 그 향으로, 그 맛으로 우리를 다시 그곳으로 데려다줍니다. 이 장을 읽으며 한 잔 마시고 싶은 도시가 떠오르셨나요? 그리운 장소가 있다면, 그곳의 와인을 한 병 찾아보세요. 그 풍경이 잔 속에서 조용히 펼쳐질지도 모르니까요.


다음 장은, 조금 더 속삭이듯 이어갑니다. ‘시간의 셀러, 오래된 와인이 말해주는 것들’. 숙성의 시간 속에서 와인이 어떻게 변화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놓쳐온 ‘시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차분히 나눠보겠습니다.



그날 기분에 따라


설레는 날엔 – 모스카토 다스티 (Moscato d’Asti)

입안에서 춤추는 탄산, 달콤한 복숭아 향기.

첫 데이트처럼 가볍고 반짝이는 너에게.


“오늘은 심장이 아니라 와인이 먼저 두근거려.”


외로운 밤엔 – 피노 누아 (Pinot Noir)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섬세한 루비빛.

부드러운 산미와 은근한 향이 마음을 덮는다.


“혼자인 밤도, 이 와인 한 잔이면 시가 돼.”


화가 나는 날엔 – 시라 (Syrah / Shiraz)

후추처럼 톡 쏘는 향, 짙은 과실의 농도.

강한 맛으로 감정을 묵직하게 눌러준다.


“나 지금 화났으니까, 이 와인도 날카로워야 해.”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엔 – 프로세코 (Prosecco)

무겁지 않지만 가볍지도 않은,

기분 좋은 미세한 거품으로 하루를 살짝 밀어준다.


“나태함도 오늘은 샴페인처럼 우아해.”


친구와 수다 떠는 날엔 – 로제 와인 (Rosé)

핑크빛 웃음처럼 가볍고 산뜻하게,

어느 음식과도 잘 어울리는 만능의 매력쟁이.


“이 와인은 대화의 윤활유, 웃음의 색깔이야.”


성공했거나, 그냥 기분 좋은 날엔 – 샴페인 (Champagne)

목을 타고 터지는 승리의 거품.

고급진 사운드, ‘뻥!’과 함께 하루가 더 빛난다.


“이 기분, 거품으로 더 크게 터뜨릴래.”


추억에 잠긴 날엔 – 리슬링 (Riesling)

산뜻하면서도 약간은 서늘한 감성.

처음 맛은 달콤, 끝맛은 약간 씁쓸. 마치 옛사랑 같아.


“그리움이 와인처럼 혀끝에 머문다.”


깊은 밤, 혼자 생각에 잠길 땐 – 까베르네 소비뇽 (Cabernet Sauvignon)

무게감 있는 풍미, 나무 향이 번지는 고요한 잔.

생각이 깊을수록 이 와인의 여운도 깊어진다.


“이 와인은 대화 대신, 침묵과 함께 마셔.”


가벼운 웃음이 필요한 날엔 – 비뇨 베르데 (Vinho Verde)

살짝 튀는 산도와 상큼함,

포르투갈의 햇살을 병에 담은 듯.


“이 와인은 마시면 기분이 ‘간질간질’해.”


달콤한 사랑을 기억하고 싶을 땐 – 아이스와인 (Icewine)

꽁꽁 언 포도에서 뽑아낸 고농축의 달콤함.

사랑처럼 귀하고 찬란한 잔.


“마시지 말고, 혀 끝에 녹여야 해. 마치 사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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