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편 위령공(衛靈公) 제37장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올곧음을 지향하되 믿음을 고수하지 아니한다. "
子曰: “君子貞而不諒.”
자왈 군자정이불량
다시금 공자의 충(忠)이 후대 유학자들의 충과 어떻게 다른지를 확인시켜주는 구절입니다. 여기선 두 가지 개념이 대비됩니다. 곧을 정(貞)과 믿을 량(諒)입니다. 믿을 량은 ‘16편 계씨(季氏) 제4장’에 한번 등장했습니다. 유익한 벗 3종류 중 믿음직한 이를 벗한다는 의미의 우량(友諒)입니다. 믿음직한 벗이 유익하다고 했던 공자가 왜 여기선 군자가 믿음에 얽매여서 안 된다고 한 걸까요?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 옳다는 믿음만 고수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올곧음을 지향하되 과거에 믿었던 것이 잘못된 것으로 판정 났음에도 “난 내 믿음에 충실한 것이니까”라고 자위해선 안 된다는 것이지요. ‘혹시 내 믿음이 틀린 건 아닐까? 그땐 맞았지만 지금은 틀린 게 아닐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질 수 있어야 진실로 올곧은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지구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은 인간의 직관에 부합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보편성에 기초한 지동설에 의해 무너질 때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 사람들은 진리를 외면한 게 되고 말았습니다. 인류가 신에 축복을 받고 탄생했다는 창조설이 진화론에 의해 무너질 때나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믿음이 정신분석학에 의해 붕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옳다고 믿었던 것에 집착하다가 참된 진실 앞에 눈 감은 결과만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사물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도 해당합니다. 어떤 사람이 참된 지도자라 생각하고 따랐지만 어느 순간 그가 변질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한번 믿고 따르기로 한 사람이니까 끝까지 믿고 따라야지 하는 순간부터 당신의 타락은 시작됩니다. 잘못된 지시를 이행하면서 당신의 그의 공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중세적 충(忠)의 관점에선 과거의 믿음을 고수하는 것이 지고지순의 가치입니다. 임금이 못났든 잘났든 무조건 불사이군(不事二君)만이 정답이니까요. 반면 공자는 믿음보다는 옳음을 더 우위에 뒀습니다. 부덕한 임금이라면 그를 믿고 따라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자의 충은 진리와 진실에 대한 것이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공자는 주희나 이황, 이이, 송시열보다 근대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