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잘못에 대처하는 방법

15편 위령공(衛靈公) 제30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잘못이다.”


子曰: “過而不改 是謂過矣.”

자왈 과이불개 시위과의



‘논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메시지의 하나일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허물이 있기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바로 잡고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자뿐 아닙니다. 자공과 자하도 동일한 메시지를 변주해 들려줍니다.


1편 학이(學而) 제8장과 9편 자한(子罕) 제25장에서 공자가 군자의 덕목 중 하나로 되풀이해 강조한 말. ‘잘못이 있으면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過則勿憚改).’ 19편 자장 제8장에 나온 자하의 말.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반드시 둘러대고 꾸미려고 한다(小人之過也必文).’ 19편 자장 제21장에서 자공의 말. “군자의 허물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다. 잘못을 저지르면 사람들이 다들 바라보지만 고쳐서 새로워지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르게 된다(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人皆見之 更也人皆仰之).” 그와 동일한 메시지가 다시 변형된 형태로 등장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고 허물이 있기 마련이라는 메시지는 서구 기독교 문화권에서도 발견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과오를 저지른다는 뜻의 라틴어 경구(errare humanum est)입니다.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여기에 한 줄을 덧붙여서 더욱 유명해진 경구를 만듭니다. ‘잘못은 인간의 몫이고 용서는 신의 몫이다(To err is human, to fogive divine)’입니다.


기독교와 유교를 비교해보면 거기서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선 인간의 잘못에 대해 운명론적 체념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잖아?”라면서 어깨를 으쓱하는 듯합니다. 그에 대한 해결책도 절대자에게서 찾습니다. 신에게 용서를 구하라는 말이니까요.


반면 유교의 경우엔 의지할 절대자가 없어서일까요? 잘못을 저지른 인간의 반성과 주체적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잘못을 저지르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그걸 바로 잡지 못하고 되풀이하는 것이 진짜 잘못이라는 겁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바로 엄벌에 처하는 법가에 비하면 유가의 관점이 더 포용력 있고 탄력적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관점과 비교하면 ‘꼰대’의 징후가 농후한 것도 사실입니다. 기독교 문화권에선 피해자가 없는 한 잘못을 저지르면 신부님이나 아니면 직접 절대자에게 고해하는 방식으로 죄사함이 가능해집니다. 죄의식이 강렬한 만큼 내밀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교 문화권에선 피해자가 있건 없건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문을 쓰고, 회초리까지 맞아가면서 개과천선을 위한 인성 개조에 나서야 합니다. 어린 시절 이불에다 오줌을 싸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며 키를 뒤집어쓰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무안을 당하게 하는 공개적 망신을 줍니다. 죄의식이 아니라 수치심을 자극하는 방식입니다.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말하면 기독교와 유교에서는 대타자를 설정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선 나를 내려다보고 심판하는 절대자를 상정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잘못에 대해서도 죄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고해성사를 하거나 기도를 합니다.


유교에선 절대자가 없기 때문에 대타자의 역할을 자신이 속한 집단이 수행합니다. 가족과 마을 사람 그리고 국가입니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르면 집단 앞에서 공개적으로 수치심을 느끼게 만듭니다. 이때 가족 집단을 대표하는 존재가 아버지이고, 마을 집단을 대표하는 존재가 스승이며, 국가 집단을 대표하는 존재가 임금입니다. 그래서 유교권에선 군사부(君師父)가 대타자의 얼굴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를 순 있지만 그것을 고치지 않는 것이 진짜 잘못’이라는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발적 노력으로 이뤄지지 않고 개인의 수치심을 자극하면서 강요하는 인성 개조 문화에서 발생합니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스스로 반성하고 고쳐가야 할 것을 대놓고 잘못했다고 말하라 강요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하게 만드는 교육방식을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도 적용하면 당장 ‘꼰대’라는 말이 나올 겁니다. 더군다나 예민한 사춘기 청소년에게 그들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교육방식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답은 인내심을 갖고 스스로 바로잡기를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상대의 양심에 호소하되 수치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소한 잘못일 경우엔 보고도 못 본 척해주는 아량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되풀이된다고 공개석상에서 망신을 줘서도 안 됩니다. 단 둘이 있을 때 그 잘못을 곧바로 지적하는 것보단 그것이 되풀이될 때 어떤 부작용이 발생하는지를 들려주는 식으로 에둘러 그것을 고쳐나가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공자의 말을 인용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공자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남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바로 잘못이라고 질책하거나 공개적으로 질책하는 것은 또 다른 잘못”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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