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편 위령공(衛靈公) 제14장
공자가 말했다. “장문중은 지위를 훔친 자일 것이다!. 유하혜가 현인임을 알면서도 그에게 지위를 주지 않았으니.”
子曰: “臧文仲其竊位者與! 知柳下惠之賢而不與立也
자왈 장문중기절위자여 지유하혜지현이불여립야
장문중과 유하혜는 공자보다 150여 년 전 노나라 대부를 지낸 인물입니다. 두 사람 다 주공(희단)의 핏줄을 물려받았기에 성(姓)은 희(姬)로 같지만 거기서 파생된 씨(氏)가 다릅니다. 고대 중국에서 성은 본디 모계혈통을 뜻하고 씨는 부계혈통을 뜻했습니다. 하지만 주나라 성립 전후로 가부장제의 전통이 확립되면서 성은 부계혈통으로 바뀌었고, 씨는 한국 족보에서 파(派)와 비슷한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춘추시대가 되면 제후국에서도 성 대신에 그 국명을 씨로 삼게 되고 제후가 되지 못한 형제들은 각기 다른 씨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전국시대가 되면서 성과 씨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오늘날에는 그 차이가 사라졌습니다.
장문중과 유하혜의 할아버지는 형제였습니다. 노나라의 12대 군주 노효공(희칭)의 아들이자 14대 노혜공(희불황)의 동생인 희구와 희전입니다. 춘추좌전에 '공자 구'로 등장하는 희구는 장(臧)씨 가문의 초대 종주인 장희백(臧僖伯)이고, 희전은 유하혜의 원래 씨인 전(展)씨 가문의 초대 종주로 모셔집니다. 15대 노환공의 아들이자 16대 노장공의 형제가 맹손씨, 중손씨, 계손씨의 종주가 된 것과 유사합니다.
장문중은 장희백의 손자로 본명은 손진(孫辰)이고, 문중은 자(字)입니다. 장씨 가문은 노나라에서 삼환 다음의 명문가로서 대대로 법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사구(司寇) 벼슬을 물려받아 왔습니다. 이 가문의 4대 종주인 장문중 역시 장공과 민공, 희공, 문공 네 제후 아래서 사구의 벼슬을 지내며 삼환 못지않은 권세와 명성을 누렸습니다.
공자가 노정공 때 이 사구 벼슬을 높여서 부른 대사구를 맡았다고 사마천은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물론 그 후에도 한동안 장씨 가문이 건재했기에 아마도 노나라 제후의 직속 영지를 관할하는 사구의 역할을 맡지 않았을까 파단됩니다. 공자가 장관급인 상대부의 반열엔 오르지 못하고 차관급 이하인 하대부에 머물렀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유하혜는 희전의 2대손 내지 3대손으로 본명은 전획(展獲)이고 자는 자금(子禽)입니다. 그래서 전금(展禽)으로도 불립니다. 식읍이 유하(柳下)이고 죽은 뒤 받은 시호가 혜(惠)여서 사후 존칭으로 유하혜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중국 유(柳)씨의 시조로 꼽히니 그로부터 또 다른 씨가 파생한 셈입니다. 촌수로 따지면 장문중의 6촌 동생 아니면 7촌 조카였을 유하혜는 장공, 민공, 희공 때 옥리(獄吏) 또는 재판관에 해당하는 사사(士師)였습니다. 따라서 유하혜의 최고 상관이 장문중인 것입니다.
18편 미자 제2장과 제8장에서 살펴봤듯이 공자는 유하혜를 백이‧숙제에 버금가는 현자로 봤습니다. 그런 유하혜를 미관말직에 처박아 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3차례나 파직한 장본인도 장문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위를 훔친 자(竊位者)’라고까지 비판하고 나선 것입니다.
좌구명이 편집한 ‘춘추좌전’ 노문공 2년서에는 공자가 장문중을 좀 더 구체적으로 비판한 대목이 등장합니다. “장문중은 어질지 못한 것이 셋(三不仁) 있었고, 지혜롭지 못한 것이 셋(三不知) 있었다. 유하혜를 높이 기용하지 않은 것(下展禽), 육관을 폐한 것(廢六關), 첩이 방석을 팔아 백성과 이익을 다투게 한 것(妾織蒲)이 삼불인이었다. 진귀한 거북 껍데기로 허황된 사치를 부린 것(作虛器), 서열을 뒤집어 제사 지낸 것(縱逆祀), 노나라 동문 밖의 봉황 모양의 섬을 신령하게 여겨 제사 지낸 것(祀爰居)이 삼부지였다.”
장문중에겐 삼불인과 삼부지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삼불후(三不朽)도 있었습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세 가지를 뜻합니다. 곧 그가 쌓은 덕(德)과 그가 이룬 공적(功) 그리고 그가 남긴 말(言)을 말합니다. 중국 역사에서 이 삼불후를 이룬 대표적 인사로 명나라 때 유학자 왕양명(왕수인)이 꼽힙니다. 양명학을 개창할 정도로 덕이 높았고, 반평생 전장을 누비며 전란을 진압한 공을 세웠으며, ‘전습록’이란 어록을 모은 책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 삼불후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 것도 ‘춘추좌전’입니다. 장문중이 죽고 나서 48년 뒤인 노양공 24년 삼환 중 숙손씨의 종주인 숙손표(叔孫豹‧숙손목자)가 진(晉)나라의 집정대부 범선자(范宣子)로부터 불후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노나라에는 돌아가신 대부 한 분이 계시는데 성함이 장문중이라 하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분의 말씀은 세상에 뚜렷이 남아 있으니 바로 그를 일컫는 것이겠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가장 높은 것은 덕을 세움(大上有立德)에 있고, 그다음은 공을 세움에 있으며(其次有立功), 그다음은 말을 세움에 있다(其次有立言) 합니다. 비록 돌아가신 지 오래지만 그 덕과 공, 말씀이 소멸되지 않았으니 이를 일컬어 불후(不朽)라 하겠습니다.”
공자는 삼불인, 삼부지라고 비판했건만 숙손표는 삼불후라고 찬사를 보냈으니 과연 장문인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이를 판단하려면 숙손표라는 인물의 안목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숙손표는 수우(竪牛)라는 서자를 총애했습니다. 수우는 도스토에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스메르자코프를 연상케 하는 악당이었습니다. 아비와 두 명의 적자 사이를 이간질해 아비로 하여금 둘째 아들 중임(仲任)과 맏아들 맹병(孟丙)을 죽이게 만듭니다. 그리곤 아비가 중병에 걸리자 측근을 다 물리치고 자신이 직접 돌보는 척하며 굶어 죽게 만듭니다. 그리곤 상도 치르지 않고 아비 재산을 다 챙겨 제나라로 야반도주합니다.
삼환의 일원으로서 온갖 권세를 누리다가 간사한 서자의 말에 속아 넘어가 두 아들을 죽이고 끝내 자신의 목숨까지 빼앗긴 숙손표의 안목을 믿어야 할까요? ‘아니면 정치란 곧 바르게 하는 것’이란 믿음으로 14년간 풍찬노숙의 삶을 살았던 우리의 돈키호테 공자의 안목을 믿어야 할까요?
어쩌면 권력자의 눈에는 적당히 유능하면서 큰 낭패를 면하고 숨진 장문중이 대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세속적 욕망과 타협하지 않았던 공자의 눈에는 그가 그토록 비판했던 무골호인의 속물, 향원(鄕原)으로 비치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