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 헌문(憲問) 제36장
공백료가 계손 씨에게 자로를 참소했다. 자복경백이 공자에게 이를 고하며 말했다. “계손 씨(대부의 지위에 있었기에 그에 대한 경칭인 夫子를 쓴 것임)는 이미 공백료의 말에 미혹되고 있으나 제 힘으로 능히 그의 시신을 공공장소에 걸어놓을 수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도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천명이며, 도가 장차 막히는 것도 천명입니다. 공백료가 그 천명을 어떻게 하겠소?”
公伯寮愬子路於季孫, 子服景伯以告曰: “夫子固有惑志於公伯寮, 吾力猶能肆諸市朝.”
공백료소자로어계손 자복경백이고왈 부자고유혹지어공백료 오력유능사저시조
子曰: “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 公伯寮其如命何?”
자왈 도지장행야여 명야 도지장폐야여 명야 공백료기여명하
공백료는 성이 공백(公伯), 이름이 료(寮)이며 자는 자주(子周)입니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자로와 함께 계손 씨 가문의 종주이자 노나라 집정대부인 계환자의 가신이 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사형인 자로를 참소하는 일을 벌인 것입니다.
자로는 당시 공자의 명을 받고 계환자의 가재(家宰)가 돼 ‘삼도도괴(三都倒壞)’ 또는 ‘예타삼도(禮墯三都)’로 불리는 비밀지령을 수행 중이었습니다. 예법에 어긋난다는 명분을 무기 삼아 삼환의 근거지인 비읍, 성읍, 후읍 세 도성의 성벽을 허물어 그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공백료가 참소했다는 것이 이와 연관됐을 수 있습니다. 노나라 대부인 자공경백이 공백료 처형을 운운할 만큼 민감한 내용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복경백은 성이 자복(子服)이고 이름은 하(何), 자는 백(伯), 시호는 경(景)이었습니다. 삼환의 한 축을 이루는 맹손 씨 가문의 방계로 그의 증조부 때부터 자복이란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춘추좌전’을 보면 자복 씨 가문은 주로 제후의 회맹과 종묘사직의 제사를 전담했습니다. 외교와 의례를 담당했으니 상대부의 반열에 들었을 것이고 예에 정통한 공문과 교유도 깊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외교적 특사로 파견될 때 자공을 대동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노나라 조정의 일을 공문에 알려주는 조력자가 되곤 했습니다.
이런 자복경백이 '사저시조(肆諸市朝)'라는 표현을 꺼내 들었습니다. 사(肆)는 처형된 시신을 전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조는 시장과 조정(궁정)의 합성어입니다. 당시 사인(士人)이 처형되면 시장에, 대부 이상이 처형되면 조정에 그 시체를 걸어뒀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조라는 말이 생겨났으니 공공장소를 뜻합니다. 한마디로 “그 배신자 녀석을 죽여 버릴까요?”라고 공자 뜻을 물은 것입니다.
자복경백은 상대부였고 공백료는 계환자의 가신이었으니 사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독하게 마음만 먹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영화 ‘대부’의 비토 콜리오네였다면 더 비정한 복수를 명했을 겁니다. 하지만 공문의 보스인 공자는 대부가 아니라 군자였습니다. 그런 암수를 쓸 리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공백료도 그의 제자였는데 다정다감한 공자가 그렇게 죽일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천명을 언급하며 공백료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자로가 계환자의 가재가 될 당시 공자는 스스로 지천명이라고 말한 50세가 넘은 나이였습니다. 그럼 공백료의 참소로 일이 틀어지지 않을 것임을 내다봤던 것일까요? 꼭 그렇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숙손 씨의 후(鄪)읍과 계손 씨의 비(費)읍의 성벽까진 허물었는데 맹손 씨의 성(郕)읍이 이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삼도도괴가 결국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공백료의 참소가 삼도도괴 실패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맹손 씨의 가신으로 성읍의 읍재를 맡고 있던 공렴처보(公斂處父)가 무장투쟁으로 맞섰기 때문입니다. 성읍은 제나라와 국경지대에 위치했는데 성벽을 허물면 제나라가 침공해올 것이라는 국방상의 이유에서였습니다.
공자는 노나라 정치의 고질병인 삼환정치의 폐해를 척결하고자 비록 삼도도괴를 은밀히 추진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정도에 어긋나는 일은 하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백료가 배신을 저질렀음에도 일의 성패는 하늘에 달린 것이니 이를 추진한 사람들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신념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자복경백의 극한 처방에 반대의 뜻을 밝힌 것입니다. 이후 공백료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지 못한 걸로 봐서는 공문의 엄중 경고를 받고 조용히 살다가 역사에서 퇴장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 공자가 대사구라는 직함을 맡은 뒤 이레 만에 ‘소인의 걸웅’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정묘를 주살했다는 ‘순자’, ‘사기’, ‘공자가어’ 등의 기록은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사형을 참소한 배신을 저지른 제자를 죽이는 일을 막아선 사람이 구체적 잘못도 없이 단지 세치 혀를 놀려 혹세무민했다는 이유만으로 대부를 주살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개혁을 도모하는 일을 배신한 사람까지 살려두는 마당에 누군가를 사상범이란 이유로 몰아죽였다는 것은 도통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소정묘 주살설은 무수한 제자백가 사상가들이 등장해 사생결단의 논쟁을 펼쳐야 했던 전국시대에 누군가에 의해 창작돼 유포됐고 유가가 권력과 결탁한 한나라 이후 왕권 강화를 돕는 한편 유가 사상과 다른 주장을 펼치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확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