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성인이 아니다

14편 헌문(憲問) 제34장

by 펭소아

어떤 사람이 말했다. “원한을 은덕으로 갚으면 어떤가요?”

공자가 말했다. “그러면 은덕은 무엇으로 갚을 것이냐? 곧음으로 원한을 갚고, 은덕은 은덕으로 갚아라.”

或曰: “以德報怨, 何如?”

혹왈 이덕보원 하여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자왈 하이보덕 이직보원 이덕보덕


다른 종교적 가르침과 크게 차별되는 내용입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원한을 은덕으로 갚으라(報怨以德)’고 가르쳤습니다. 부처의 전생 설화 중에는 굶주린 호랑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몸을 던져 호랑이 먹이가 됐다는 ‘사신사호(捨身飼虎)’ 설화가 있습니다. 예수도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복음 5장 44절)고 설파했습니다. 이렇듯 대부분의 종교가 이덕보원(以德報怨)을 말하건만 공자는 이직보원(以直報怨)과 이덕보덕(以德報德)을 말합니다.


먼저 이직보원의 뜻부터 살펴볼까요? 곧음으로 원한을 갚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일까요? 누군가 원한을 품고 나를 대할 때 똑같은 감정으로 보복하려 들지 말라는 취지는 이덕보원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곧음과 은덕이 같을 순 없겠지요. 여기서 곧음은 사심이 없는 공정함을 말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원한의 감정을 갖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신의 주관적 감정으로 대응하지 말고 객관적 기준을 적용하라는 뜻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인과응보의 고대적 정의관에 탈피하되 그렇다고 무조건 용서하기보다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처벌함으로써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걸 막으란 뜻입니다. 이야말로 사적 복수를 금지하고 공적 응징을 법제화한 근대적 사법제도와 궤를 같이 하는 발언입니다. 물론 공자는 법보다는 예를 강조하긴 했지만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원한의 무한 루프를 차단하기 위해 이성적이고 제도적인 장치에 의지하라 말한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입니다. 원한을 은덕으로 갚아버릴 경우 은덕은 과연 무엇으로 갚아야 하느냐는 반문입니다. 단순히 굶주린 호랑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면 언젠가 내 목숨을 구했던 호랑이에게 보답하려 할 때 과연 내 한 목숨 갖고 되겠느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맹자가 묵적의 겸애(兼愛)를 비판할 때 동원한 논리이기도 합니다. 부모와 형제처럼 가까운 사람부터 챙기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어떻게 모든 인간을 똑같이 사랑할 수 있느냐는 논리입니다.

부처의 자비심이나 예수의 사랑은 차별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그래서 절대적이라고 합니다. 반면 인간은 상대적 존재입니다. 아무리 절대성을 지향한다 하더라도 차별과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은 깜깜한 밤 저 높은 언덕에 지펴놓은 황토불이나 횃불과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불빛을 보고 저마다 마음의 촛불을 지핍니다. 하지만 촛불은 바람에 약해 깜빡이기 마련이고 꺼지기 쉽습니다.


노자, 부처, 예수는 저 높은 언덕 위의 횃불의 관점에 서 있다면 공자는 언덕 아래 무수한 촛불의 관점에 서 있습니다. 공자가 천의무봉의 성인(saint)이 아니라 인간적인 프로네시스(실천적 지혜)의 신봉자임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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