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리아의 마지막 노래

14편 헌문(憲問) 제21장

by 펭소아

진성자가 (자신의 주군인) 제나라 간공을 시해했다. 공자가 목욕재계하고 조정에 들어가 노나라 애공에게 고했다. “진항이 그 군주를 시해했으니 토벌하기를 청합니다”.

애공이 말했다. “세 대부(삼환)에게 말하라.”

공자가 말했다. “내가 일찍이 대부의 말석에 있었기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주군께서는 세 대부에게 말하라고 하시는구나.”

세 사람에게 가 말하니 안 된다고 했다.

공자가 말했다. “내가 일찍이 대부의 말석에 있었기에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陳成子弑簡公. 孔子沐浴而朝, 告於哀公曰: “陳恒弑其君, 請討之.”

진성자시간공 공자목욕이조 고어애공왈 진항시기군 청토지

公曰: “告夫三子.”

공왈 고부삼자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君曰, ‘告夫三子’者!”

공자왈 이오종대부지후 불감불고야 군왈 고부삼자자

之三子告, 不可.

지삼자고 불가

孔子曰: “以吾從大夫之後, 不敢不告也.”

공자왈 이오종대부지후 불감불고야



진성자(陳成子) 또는 진항(陳恒)은 제나라의 집정대부입니다. 본래 이름은 전항(田恒)으로 전성자(田成子)로도 불립니다. 조상이 진(陳)나라 출신이라고 진씨 성을 붙이는 경우가 많아서입니다. 제가 보기엔 본디 제나라 사람이 아님에도 제나라를 훔쳤다 하여 낮잡아 부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한문제 유항(劉恒)의 이름을 피휘(避諱)하기 위해 전상(田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전항의 7대조인 진완(陳完)은 진여공(陳厲公)의 아들이었습니다. 여공이 죽고 후계문제로 내전이 벌어지자 제환공(강소백) 치하의 제나라로 망명하며 성도 당시 진(陳)과 발음이 같았던 전(田)으로 바꿨습니다. 제환공은 그에게 경(卿)의 지위를 주려했으나 사양하고 공인의 업무를 관장하는 공정(工正)이란 낮은 직책을 자청해 맡습니다. 이것이 신의 한 수였으니 문물과 교역이 발달한 제나라에서 공정은 도자기, 나무, 물고기, 쌀의 유통을 장악해 차곡차곡 경제적 부를 축적합니다.


그리고 제경공 때 명재상인 안영이 죽고 난 뒤 공실을 능가할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전씨 가문의 8대 종주 전항이 재상의 자리를 꿰찹니다. 전항은 기원전 490년 제경공이 죽은 뒤 그 자식들 간에 골육상쟁이 벌어지자 킹메이커 역할을 합니다. 그러다 기원전 481년 자기가 제후로 옹립한 제간공(강임)까지 시해하고 그 동생 강오를 꼭두각시 제후(제평공)로 삼은 뒤 제나라 전권을 장악합니다. 이후 강씨 종실은 아무런 힘을 발휘 못하다가 대략 100년 뒤인 기원전 386년 전항의 고손자인 전화(田和)가 전씨 종실을 세우게 됩니다. 그 전의 제나라를 강제(姜齊)라 부르고 그 이후의 제나라는 전제(田齊)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전항이 제간공을 시해했을 당시 공자 나이는 70세였습니다. 천하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온 뒤 정치 일선에선 물러나 상징적인 원로 대우만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그가 목욕재계까지 하고 입조해 하극상을 저지른 이웃나라의 재상을 토벌할 것을 주청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국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제나라는 춘추오패의 선두로 꼽힐 정도의 강대국이었습니다. 반면 노나라는 그런 제나라의 침략 위협에 시달리는 중소국이었습니다. 게다가 제후가 신하의 손에 피살된 혼란스러운 정국이라 제나라의 국력이 약해졌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려웠습니다. 오랫동안 제나라의 실권을 장악해온 전항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징치하겠다면 다른 제후국들과 회맹을 맺어 공동 군사행동을 펼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나라의 제후인 노애공이나 삼환세력은 그만한 도덕적, 외교적 영향력을 발휘할 역량도 의지도 부족했습니다. 자신들 앞가림하기도 급급한 사람들이 이웃나라의 내정문제를 들어 군사를 동원한다고 비웃음이나 살 게 뻔했습니다.


그러니 공자가 아무리 정성스럽게 이를 청했다 하더라도 받아들여졌을 리 만무했습니다. 노애공이나 삼환세력의 눈에는 그런 공자가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돈키호테보다 더 허무맹랑하게 비쳤을 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돈키호테가 이미 유명무실해진 기사도를 지키겠다며 환상 속의 거인을 향해 나 홀로 돌격을 감행했다면 공자는 무너져가는 주나라의 종법질서를 지키겠다며 노나라 전체를 불구덩이로 몰고 가려는 것으로 비쳤을 테니까요.


공자도 이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래도 한때 대부의 말석을 차지하고 노나라의 녹봉을 받아먹은 사람이기에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말을 되풀이한 이유입니다. 그럼 이 역시 공자의 삶을 관통한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의 산물로 봐야 할까요? 공자의 공적 정치 행위의 최후를 장식한다는 점에서 그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제나라의 상황을 방치한다면 노나라는 물론 무수한 제후국들이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는 ‘카나리아의 마지막 노래’ 같은 것 아니었을까요?


실제 춘추시대가 끝나는 시점을 이 상소가 있고 2년 뒤 공자가 죽은 해인 기원전 479년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 북방의 강대국 진(晉)나라가 노나라의 삼환이나 다름없는 세 가문에 의해 조(趙) 위(魏) 한(韓) 세 나라로 나뉘는 기원전 476년으로 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론 태평성대에 출현해야 할 기린이 노나라에 출현했다가 사체로 발견되자 공자가 춘추의 집필을 멈췄다고 하는 기원전 481년을 그 기점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 기점은 제각각이어도 그 3개의 시점이 공자의 죽음을 중심으로 5년 안에 몰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자신의 죽음을 통해 위기의 도래를 예언하는 카나리아의 마지막 노래로 해석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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