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편 자장(子張) 제24장
(노나라 대부) 숙손무숙이 공자를 헐뜯으니 자공이 말하였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 공자는 헐뜯을 수 없다. 다른 사람의 현명함은 언덕과 같아서 넘을 수 있다. 공자의 현명함은 해와 달과 같아서 넘을 수가 없다. 사람이 아무리 따고 싶더라도 어찌 해와 달에 흠 하나 입힐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지혜가 부족함을 드러낼 뿐이다.”
叔孫武叔毁仲尼. 子貢曰: “無以爲也! 仲尼不可毁也. 他人之賢者. 丘陵也, 猶可踰也. 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 人雖欲自絶, 其何傷於日月乎? 多見其不知量也.”
숙손무숙훼중니 자공왈 무이위야 중니불가훼야 타인지현자 구릉야 유가유야 중니 일월야 무득이유언 인수욕자절 기하상어일월호 다견기부지량야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지만 현재로 치면 4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관직을, 그것도 잠시 잠깐 맡는데 그쳤습니다. 공자의 언행이 기록된 ‘공자가어’에는 공자가 노정공 시절 사공(司空)과 대사구(大司寇)을 맡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사공은 토목공사의 최고 책임자요, 대사구는 형옥의 최고 책임자이니 각각 국토교통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공자가어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고증학자인 왕숙이 후대의 여러 설을 모아서 편집한 책이란 점에서 과장됐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설사 대부의 반열에 올랐다 하더라도 조선시대 정삼품 중 상계(上階) 이상의 당상관에 해당한다 할 상대부는 못됐고 정3품 하계(下階) 이하의 당하관에 해당하는 하대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춘추시대에 태어난 공자는 위관급 장교에 해당하는 사인(士人) 출신이었기에 공경대부(公卿大夫)로 불리는 상층 세습귀족의 반열에 오르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공과 경은 본디 주나라 최고위직 재상(삼공구경·三公九卿)의 칭호였습니다. 그러다 춘추시대 들면서 공은 주왕실에서 봉토로 받은 방국을 다스리는 후(后)를 통칭하게 됐습니다. 요즘은 제후라는 말이 더 익숙하지만 이는 ‘모두 제(諸)’자를 붙여서 ‘후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이란 뜻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와 함께 경과 대부는 제후로부터 식읍을 하사 받은 가신을 뜻하게 됐는데 경은 재상급, 대부는 장관급의 고위직을 맡았습니다.
이는 당시 군사편제와 연계돼 있습니다. 은나라와 주나라를 거쳐 춘추시대까지의 전쟁은 4마리 또는 2마리 말이 끄는 전차(戰車)를 몰고 치렀습니다. 이때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전차를 모는 인물을 사(士) 또는 부(夫)라고 불렀는데 이들이 바로 사인(士人) 계급에 해당합니다. 중세 유럽의 기사(knight)와 비슷한 존재였습니다. 전차를 한자로 승(乘)이라고 했는데 몇 승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느냐가 국력의 척도였습니다. 100승 이상을 동원하고 지휘하는 이가 대부(大夫) 요, 그런 대부를 수십 명 씩 이끌고 전쟁을 총지휘하는 이가 경(卿)인 것입니다.
이런 전쟁 편제에서 제일 말단의 전투원에 해당하는 사인은 경·대부의 가신에 해당합니다. 경·대부처럼 식읍을 하사 받는 게 아니라 녹봉을 받고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 지위도 세습되지 않았습니다. 사인은 다시 상사(上士)-중사(中士)-하사(下士)로 나뉘었는데 상사와 중사는 ‘식전(食田)‘이라 하여 소출로 먹고살 땅을 하사 받았지만 하사는 노동력을 제공해 먹고사는 서민(庶民)처럼 곡식으로 녹봉을 받았기에 서민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읍재(邑宰)를 지냈다고 하니 하사는 아니었고 상사나 중사쯤은 됐던 듯합니다. 하지만 공자 나이 세 살에 세상을 떴고 홀어머니 아래서 어렵게 고학하며 자란 공자를 그의 고향인 노나라에선 “똑똑해봤자 결국 사인”이란 의식이 팽배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는 대부분 사인출신이었고 그들 중 일부는 제후국에서 경과 대부의 자리까지 오르긴 했지만 자신이 태어나 자란 본고장 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발탁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자도 이를 염두에 두고 무려 14년간 천하를 주유했지만 결국 채용에 실패했습니다.
반면 자공은 노나라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상대부의 반열에 오를 만큼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특히 노나라가 제나라의 공격을 받게 될 위기에 처했을 때 제나라는 물론 오(吳), 월(越), 진(晉)까지 5개국을 넘나들며 외교전을 펼쳐서 노나라를 구한 이야기는 전설에 가깝습니다. 그 덕에 노나라와 자신의 본국인 위나라에서 상대부로 이름을 떨쳤고 이재에도 밝아 말년에 제나라로 건너가 제나라 3대 부자로 떵떵거리며 잘 살았습니다.
이런 자공의 물질적 정신적 후원에 힘입어 공자 학파는 제자백가 중 최강의 학파가 됩니다. 자공은 정계에서 물러난 뒤 제나라에서 살면서 훗날 공문 출신의 자하의 학맥을 잇는 순자가 좌장을 맡게 되는 직하 학파 형성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란 추정을 낳고 있습니다.
주희로 대표되는 송나라 성리학자들은 공자 학맥의 정통이 순자가 아니라 맹자라 봅니다. 자공이 장사치로 큰돈을 모았다는 점 때문에 성리학의 사농공상의 세계관에 걸맞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공은 공자 제자 3000명 중 탁월한 70여 명을 뜻하는 72현(七十二賢)은 물론 공자가 직접 뽑은 공문십철(孔門十哲·안연, 민자건, 염백우, 염옹, 재아, 자공, 염구, 자로, 자유, 자하)의 한 명에도 들어갑니다. 그렇지만 도통론을 중시하는 성리학자들에 의해 집단 따돌림의 대상이 돼 그 위상이 폄하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명말의 학자 이탁오는 “자로와 자공 같은 이를 제자로 둔 것은 한 나라를 얻어 다스리는 일보다 훨씬 낫다”라고 평할 정도로 자공은 스승의 진가를 세상에 널리 알린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숙손무숙 같은 노나라 대부가 청출어람론을 펼치며 공자가 자공만 못하다고 쑥덕거린 것입니다. 객관적 위상만 보면 틀린 말도 아니지만 자공은 그때마다 적극적인 공자 옹호론을 펼칩니다. ‘논어’에 실린 글 중에 그에 해당하는 내용이 4개장이나 될 정도이니 자공의 지극정성 스승사랑을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공의 그런 공자 옹호의 변 중에서 아마도 공자를 해와 달에 견준 이 글이 아마도 그 절정이 아닐까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스승은 훌륭한 제자를 둬야 비로소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법. 부처에게 마하가섭이 있었고, 소크라테스에게 플라톤이 있었고, 예수에게 바울이 있었다면 공자에겐 자공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공자가 가장 아낀 제자는 반평생 동고동락을 같이 한 의리의 사내 자로일 수도 있고 제자이지만 마음 깊이 감복한 안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공자를 있게 해 준 제자를 꼽으라면 자공이 넘버원 아닐까요? 자공이 있었기에 공자가 세계적 성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는 건 저만의 착각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