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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Jan 08. 2021

공자 가르침을 실천한 진짜 제자

19편 자장(子張) 제23장

  (노나라의 대부) 숙손무숙이 조정에서 대부들과 이야기하기를 “자공이 중니보다 현명하다.” (또 다른 대부) 자복경백이 이를 자공에게 알리니 자공이 말했다.”담장에 비유하면 사(자공의 이름)의 담장은 어깨 높이이므로 방과 집의 좋은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공자의 담장은 높이가 몇 길이나 되므로,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으면 그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성함을 보지 못합니다. 그 문을 찾아 들어간 사람이 적으니, 무숙 선생이 그렇게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     

  

   叔孫武叔語大夫於朝曰: "子貢賢於仲尼." 子服景伯以告子貢

   숙손무숙어대부어조왈     자공현어중니     자복경백이고자공 

  子貢曰:  "譬之宮牆賜之牆也及肩窺見室家之好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不見宗廟之美
  자공왈     비지궁장   사지장야급견   규견지가지호   부자지장수인     부득기문이입   불견종묘지미 

  百官之富得其門者或寡矣夫子之云不亦宜乎."

   백관지부  득기문자혹과의 부자지운  불역의호

   

 

  다시 숙손무숙이 악역을 맡네요. 노나라의 또 다른 대부인 자공경백이 이를 자공에게 전합니다. 그러자 이번엔 궁궐을 출입하는 고위 관료만 알 수 있는 비유법을 들어 공자의 위대함을 설파합니다. 궁궐의 높은 담장 너머에 어떤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이 감춰져 있는지를 일반 백성이 알 수 없듯이 공자의 높고 아름다운 경지를 아무나 알 수 없는 법이라고. 제비와 까치가 어찌 기러기와 고니의 높은 뜻을 알겠느냐고 한 장자의 표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공의 말에선 공문(孔門)에 들어간 것에 대한 남다른 자긍심이 엿보입니다. 일국의 대부도 제대로 접하기 어려운 공자의 진면목을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를 가졌다는 것에 대한 희열감입니다. 제가 볼 때 자공은 스스로의 통찰력과 안목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내였습니다. 그래서 외교적 수사를 펼칠 때가 아니면 인물의 장단점을 날카롭게 포착해내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예외가 있었다면 스승인 공자 그리고 그 스승마저 그 인품에 감화됐던 동학(同學) 안연(자공보다 한 살 위) 정도일 겁니다.      


  공자는 그런 자공의 영특함이 자만심으로 흐를까 끊임없이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툭하면 ‘사(賜)야, 너는 그 잘난 척이 문제야’라고 끊임없이 견제구를 날렸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참고 넘어가지 않았을 자공이지만 공자가 쏘는 면박과 핀잔의 화살 앞에선 볼멘소리 한 번 내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공자는 자공이 하늘 아래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내이자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따른 인생의 좌표 같은 존재였던 겁니다.  


  공자가 죽자 제자들은 부모상에 준해 3년상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다시 3년을 더해 6년상을 치른 유일한 제자가 바로 자공이었습니다. 상당수의 공자 제자는 부모상을 3년상으로 치르라는 공자의 가르침에 반발했습니다. '공문십철(孔門十哲)'로 불린 공자의 10대 제자 중 말솜씨로 자공과 이름을 나란히 했던 재아(宰我)가 대표적입니다. 왕이나 제후도 아닌데 생업을 포기하고 3년상을 치른다는 게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아와 더불어 실천보다 말이 앞선다는 핀잔을 들었던 자공이 스승의 무덤을 3년도 아니고 그 두 배의 세월 동안 지켰다는 게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맹자와 주자 같은 후대의 유학자들은 그런 자공을 싫어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들이 중시하는 수제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똑똑하지만 까칠하고, 행동보다 말이 앞서고, 장사꾼처럼 너무 실리를 밝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사실 자공은 안연에 비하면 어질지 못했고, 자로에 비하면 의로움이 부족했고, 유약에 비하면 그릇이 작았고, 자여(증참)에 비하면 정서적 유대감이 부족해 보입니다. 자장에 비하면 패기가 적었고, 자하나 자유에 비하면 예술적 감수성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좋은 스승이나 좋은 선배는 못됐을 수도 있습니다.


  대신 자공은 총명했고 유능했고 인간 심리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스승이 하나를 말하면 둘을 알았고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예민하게 포착할 줄 알았습니다. 또 스승과 동학들이 난국에 처할 때마다 앞장서서 문제를 풀어가는 해결사 같은 존재였습니다. 보통 이런 꾀돌이들은 대의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자공은 공자로부터 배운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실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할 수 있는 6년을 시묘살이로 채울 수 있었던 겁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자공이야말로 공자의 진짜배기 제자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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