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편 자장(子張) 제22장
위나라의 대부 공손조(公孫朝)가 자공에게 물었다. “공자는 어디서 배웠는가요.” 자공이 말했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도가 땅에 처박히지 않고 사람들 속에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현명한 자는 그중 큰 도를 알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도 그중 작은 도는 압니다. (그러니) 문무지도가 있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공자께서 어디에서인들 배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어찌 정해진 스승을 따로 뒀겠습니까?”
衛公孫朝問於子貢曰: 仲尼焉學?
위공손조문어자공왈 중니언학
子貢曰: “文武之道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
자공왈 문무지도미추어지 재인 현자지기대자 불현자지기소자 막불유문무지도언 부자언불학 이역하상사지유
자공은 위(衛) 나라 출신입니다. 춘추시대 오패(五覇)로 불린 강대국 진(晋)이 세 나라로 분열돼 성립된 위(威) 나라보다 역사는 길지만 ‘가늘고 길게 살아남은’ 약소국입니다. 은나라 최후의 군주 주(紂) 왕의 아들을 제후로 삼고 은나라 옛 수도 일대에 세워져 처음엔 은(殷)으로 불렸으나 반란을 일으킨 뒤 주 무왕의 동생을 제후로 봉하면서 주나라를 지키라는 뜻의 위(衛)라는 국호를 받은 나라입니다. 공자의 조상이 살던 송(宋) 나라와 함께 은의 유민이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공손조는 그 위나라의 대부입니다. 사서를 보면 춘추시대 공손조(公孫朝)라는 이름의 동명이인이 넷이나 등장합니다. 공자가 흠모했던 정(鄭) 나라의 재상 자산(子産·본명 공손교·公孫僑)의 형으로 애주가로 유명했던 공손조가 있고, 공자가 숨지고 1년 뒤인 기원전 478년 진(陣)나라를 멸망시킨 초나라 재상 공손조가 있습니다. 또 노나라 맹손씨 가문의 성읍(郕邑)에서 가재를 지낸 공손조가 있고 위나라 대부였던 공손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위공손조(衛公孫朝)라고 구별해 표기한 것입니다. 자공은 이 위나라에서 대부를 지냈는데 아마도 그때의 대화인 것 같습니다.
중국과 대만에서 스승의 날은 공자의 생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9월 28일입니다. 왜 그날일까요? 공자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가 ‘유교무류(有敎無類)’입니다. ‘가르침에 있어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공자의 교육혁명을 상징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중국에선 왕족과 귀족만이 사설 교사에게서 배움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말린 육포 한 묶음(속수·束脩)’의 수업료만 내면 공자의 제자가 돼 배움의 길을 열 수 있게 됐습니다. 여기서 서당에 아이를 처음 보낼 때 육포 한 두루미를 보내는 ‘속수지례(束脩之禮)’의 전통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공자는 중국인들에게 참스승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위나라 대부 공손조의 질문은 이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제자가 많은 공자는 그럼 누구에게서 배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지요. 자공은 그 질문을 멋들어지게 받아칩니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도를 깨우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자의 스승이었다고.
실제 공자에 대한 기록을 보면 공자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면 가르침을 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론 공자보다 후대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기에 후대의 창작으로 보이지만 노자를 만났을 때 예에 대해 묻고, 주나라 왕실의 대부로 음악에 능통했던 장홍(萇弘)에겐 음악을 묻고, 옛 관직명에 대해 정통했던 현자 담자(郯子)에겐 관직에 대해 묻고, 타악기의 하나인 경쇠와 현악기인 거문고 연주에 탁월했던 사양(師襄)에게선 거문고를 배웠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각각의 전문분야 사람을 만나면 묻고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겁니다.
공자의 위대한 점은 이렇게 전문지식을 취합하고 종합해 ‘군자학’이라는 자신만의 종합적 학문을 구축하고 완성한 점입니다. 공자가 처음 학당을 열었을 때는 ‘육예(六藝)’라 하여 당시 하급관료 역할을 수행한 사인(士人) 계급에 필요한 여섯 가지 전문적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활쏘기(射), 말타기(御), 글쓰기(書), 셈하기(數), 악기 연주(樂), 예법(禮)이었습니다.
여기에 점차 다양한 전문 분야의 지식을 더하고 인문학적 통찰을 가미해 어진 사람(仁者), 지혜로운 사람(知者),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君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종합적 학문을 완성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처음엔 사설 전문학원 강사였다가 나중엔 종합대학교의 총장이 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공자의 학문을 칭하던 대학(大學)이 오늘날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훗날 제자백가로 알려진 스승이 여럿이지만 그 원형이 된 인물이 바로 공자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공자를 언급할 때 제일 먼저 나오는 표현이 ‘만세사표(萬世師表)’ 입니다. 세상 모든 곳 모든 세월을 통틀어 스승의 본보기라는 뜻입니다. 지위고하와 재산유무에 없이 상관없이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가르침의 혜택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최초로 설파하고 이를 실천에 옮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왕족이나 귀족 아니면 못해도 하급관료는 돼야 가능했던 교육의 혜택을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시킨 최초의 인물인 것입니다. 이런 혁명적 발상은 그가 이상적 인간으로 설정한 군자(君子)라는 용어에서도 확인됩니다. 공자 이전까지 임금 아니면 제후에게만 쓸 수 있었던 군(君)이란 용어를 혈통에 상관없이 모든 계층으로 확산시킨 것이니 이것이 어찌 교육혁명이 아니겠습니까?
송나라 때 성리학 사상가였던 송유(宋儒)도 조선시대 이황과 이이도 이런 공자의 혁명적 면모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현대에 들어선 그런 성리학적 관점으로 전유된 공자만을 알고 공자 비판에 나서니 허수아비 공격이 따로 없습니다. 자공은 그런 공자의 진면목을 가장 잘 파악한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송유나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싫어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공이 공자의 스승을 묻은 질문에 답한 논어의 이 대목은 꼭 그들을 겨냥한 것 같습니다. 오로지 공자와 맹자, 주자만을 스승으로 섬기고 다른 이들을 배격하기 바쁜 쫌생원들에 대한 일갈처럼 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