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편 자로(子路) 제24장
자공이 물었다. "고을 사람이 모두 다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아직 부족하다.”
“고을 사람이 모두 다 싫어하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아직 부족하다. 착한 고을 사람이 좋아하고, 못된 고을 사람이 싫어하는 것만 못하다.”
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 “未可也.”
자공문왈 향인개호지 하여 자왈 미가야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향인개오지 하여 자왈 미가야 불여향인지선자호지 기불선자오지
어진 사람이라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사람을 보통 무골호인(無骨好人)이라고 부릅니다. 누구에게나 순하고 착하게 대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런 인물은 둘 중 하나입니다. 물러 터져서 다른 사람에게 이용만 당하는 호구(虎口)이거나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면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말하고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여주면서 실속은 자신이 챙기는 닳고 닳은 속물입니다. 특히 후자는 공자가 덕의 적이라 부를 정도로 혐오했던 향원(鄕原)입니다.
어진 사람은 그래선 안 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로 인해 착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나쁜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야 진정한 인인(仁人) 또는 군자(君子)로 불릴 수 있다는 겁니다.
여론 내지 언론과 관련하여 “뭇사람이 싫어하더라도 반드시 살피고, 뭇사람이 좋게 말하더라도 반드시 살피라”(15편 ‘위령공’ 제28장)와 호응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위군자의 문제점과 관련해선 “향원은 덕의 적이다”(17편 ‘양화’ 제13장)와 공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 약점이 있습니다. 세상은 결코 선악(善惡)과 호오(好惡)의 이분법으로만 재단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경우엔 착한 사람이었다가 어떤 경우엔 나쁜 사람이 되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반드시 이익을 좇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엔 허울 좋은 명분에 현혹돼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또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이렇게 딱 둘로 분류되지 않는 사람 또는 사안이 참 많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판단을 보류하는 게 또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악의 기준과 호오의 기준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다, 나쁘다를 판정하는 것과 그런 판단에 대해 선악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범주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랑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러고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선악의 기준을 들이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착하고 바른 사람이고. 싫어하는 사람은 나쁘고 비뚠 사람이라고 자기 편할 데로 판단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장의 내용은 군자나 인인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시시비비에 대한 기준이 뚜렷한 사람이라 새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굳이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의 정신에 입각해 그러한 선악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강요하지 말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