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편 향당(鄕黨) 제12장
태묘에 들어가서는 모든 일을 하나하나 물었다.
入太廟, 每事問
입태묘 매사문
3편 ‘팔일’ 제15장에도 같은 내용이 등장합니다. 팔일 편의 내용이 더 자세합니다, 태묘에 대해선 노나라 시조 주공의 묘라고 하는데 아마도 주공을 시조로 하는 노나라 역대 제후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구보다 예에 정통했건 공자가 노나라 종묘에 들어서 모든 일을 하나하나 물었다 하니 왜였는지 의아합니다.
이에 대해서 ‘공자가어’와 ‘맹자’를 토대로 공자가 스무 살 전후로 곡식의 출납을 맡아보던 창고지기(委吏)와 가축을 돌보는 목장지기(乘田) 같은 미관말직을 전전할 때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 무렵 태묘에서 하위직 예관을 처음 맡게 된 공자가 이론으로 배운 것을 현장에서 하나하나 맞는지 물어서 확인했다는 설명입니다.
그럴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팔일 편에 소개된 내용까지 읽으면 느낌이 좀 다릅니다. 그런 공자를 보고 “누가 추(鄹)읍 사람의 아들(鄹人之子)이 예를 안다고 말한 것이냐? 태묘에 들자 하나하나 묻고 있지 않은가?”라고 비웃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를 들은 공자는 “이게 예입니다(是禮也)”라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추인지자(鄹人之子)라는 표현은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공흘)이 추(鄹)읍의 읍재를 지낸 것을 겨냥한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공자의 내력을 잘 꿰고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참고로 이 추(鄹)는 맹자의 고향인 추(鄒)와 다른 지역입니다. 맹자의 본향인 추는 춘추시대까지 주(邾)나라라는 소국이었다가 전국시대가 되면서 노나라로 흡수된 지역입니다.
이렇게 공자의 내력까지 꿰고 있었다는 것은 공자의 명성이 어느 정도 확립된 뒤의 일임을 시사합니다. 아마도 공자가 지천명의 나이로 뒤늦게 출사한 뒤 예에 정통하다는 명성이 퍼진 뒤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단순 업무를 처리하는 청년이 처음 태묘에 들어 매사에 대해 묻는다고 그렇게까지 냉소적 반응을 보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와 관련한 사안을 처리하는 사(史)의 관직에 있었기에 시비를 건 것일 겁니다.
핵심은 ‘시례야(是禮也)’라는 공자의 답에 있습니다. 공자가 생각하는 예는 그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이를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맹자가 예의 마음가짐에 대해 사양지심(辭讓之心)이란 표현을 쓴 이유와 궤를 같이 합니다.
따라서 공자가 먼저 아무것도 모르는 양 하나하나 질문을 던져 상대의 설명을 청하면서 예법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겨뤄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상대가 답하지 못하는 대목이 있을 때 “제가 배운 바로는…”이라며 이를 설명해주면 상대가 마음으로 승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공자보다 81년 뒤에 태어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상대의 무지를 일깨워주기 위해 택했던 문답법 또는 산파술이라는 화술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 걸려들면 그 상대의 무지가 폭로됩니다. 그로 인해 모욕감과 불쾌감을 느낀 사람들 사이에 원망과 비방이 생겼고 그로 인해 재판에 회부돼 결국 사형까지 언도받게 된 것입니다. 반면 공자의 사양지문(辭讓之問)을 받게 되면 왠지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받다가 결국에는 공자의 해박한 지식 앞에 마음 깊이 승복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공자가 말한 ‘시례야’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알면서도 일부러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임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 그런 겸손한 자세로 문답이 오가면서 상대의 부족한 점을 은연중에 메워주고 채워줌으로써 부지불식간에 예법의 지식을 넓혀주는 동시에 예의 본질을 일깨워주는 것.
실제 예에 대해 공자가 무지하다고 여겼던 사람도 "그게 바로 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죽비로 맞은 듯이 번쩍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고 마음 깊이 공자에게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로 공자가 소크라테스를 능가하는 점이라 말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