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편 자한(子罕) 제14장
공자가 주나라 동쪽에 있던 구이(九夷)에서 살고 싶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누추할 텐데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군자가 가서 거하는데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
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자욕거구이 혹왈 누 여지하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
군자학에 대한 공자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구이(九夷)는 동이(東夷)의 별칭으로 당시 주나라와 동쪽 국경 밖의 여러 민족이 사는 곳을 말합니다. 九를 아홉이란 숫자로 새겨서 9개의 동이족이란 뜻으로 새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보다는 구리(句麗)와 같은 발음을 취한 가차어일 가능성이 큽니다. 구리는 고구리(고구려)와 고리(고려)와 같은 나라명의 뿌리가 된 민족명입니다. 구리와 동이, 예맥(濊貊)은 모두 당시 옛조선에 거주하던 민족을 지칭했으니 한민족의 뿌리가 된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여러 이민족 중에 유독 동이 또는 구이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18편 미자 제8장에서 공자가 일민이라 칭송한 7명 중 한 명인 소련은 ‘예기’에서 부모상을 3년상으로 잘 치렀다고 공자의 칭송을 받은 인물인데 동이의 자손으로 소개돼 있습니다. ‘공자세가’에는 공자가 천하주유 중 진(陳)나라에 머물 때 돌촉으로 된 화살에 맞아 죽은 매가 발견되자 공자가 그 화살이 숙신(肅愼)의 화살임을 설명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숙신은 주신과 조선과 같은 나라명의 뿌리가 되는 호칭으로 역시 동이를 지칭합니다. 공자의 모국인 노나라가 산둥반도에 위치해 동이와 가까웠으니 만물박사였던 공자가 그에 대한 정보가 풍성했을 것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자학의 나라로 소중화를 지향했던 조선에선 논어의 이 대목에 감읍하는 유학자들이 많았습니다. 만고의 스승으로 섬기는 공자가 특별히 어여삐 여긴 땅이라는 자부심 때문입니다. 남한에서 민족적 에고가 벌겋게 달아오르던 1980년대 이후 은나라도 동이의 일환이므로 은나라의 후손을 자임한 공자도 동이족이라는 주장도 횡행했습니다. 그에 입각해 논어의 이 대목도 공자가 조상의 뿌리를 찾아 동이에 가서 살고 싶어 한 것으로 풀이되기도 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바라보는 격입니다. 공자의 삶과 사상을 토대로 본다면 여기서 구이는 중화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지역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호명된 것입니다. 공자의 이상 정치를 받아주려는 제후국이 한 군데도 없게 되자 “차라리 이민족의 나라로 넘어가서라도 문덕(文德)과 인정(仁政)을 일궈볼까?”라고 한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동이-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 중 동이가 언급된 것은 노나라와 가장 가깝고 그래서 공자가 제일 잘 아는 지역이기 때문으로 봐야 합니다.
공자의 이런 한탄을 접한 누군가가 슬쩍 시비를 겁니다. 아마도 공자가 늘 주나라 문명 질서(禮)를 수립한 주무왕과 주공의 정신적 계승자임을 자부해온 것을 아는 인물일 것입니다. 그의 질문에는 ‘동이는 그렇게 당신이 자부하는 예를 모르는 나라인데 어떻게 당신이 목표로 하는 예치(禮治)와 문덕, 인정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에 대한 공자의 답이 일품입니다. 군자가 머무는 곳이라면 마땅히 예치와 문덕, 인정의 교화가 일어날 터인데 어찌 누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받아친 것입니다. ‘그 문명 질서 핵심 가치를 뜻하는 '사문(斯文)‘의 정수가 담긴 군자학을 일군 내가 가서 다스리는데 어찌 그곳에 문명이 융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철철 넘치는 발언입니다.
이렇듯 이 장에서 구이라는 공간은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구이를 서융, 남만, 북적 중 하나로 바꾼다 해도 전체 맥락이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공자가 벼려낸 군자학이 당시 천하로 불린 주나라의 영역을 벗어나서도 보편성을 발휘할 수 있음을 공자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점에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실제 군자학은 비록 중국의 역사와 전통 안에서 배태됐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예치와 문덕, 인정이라는 이상은 2500년이 지난 21세기에도 인류 보편의 가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중국이란 특정 공간의 전통이 깊이 베인 유학이 아니라 군자학으로 새로 호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