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앎의 경지

6편 옹야(雍也) 제20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자왈 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낙지자



공자 말에서 연원한 것인 줄은 모르면서 다양하게 변주되는 표현입니다. 그 사유구조를 분석해보면 앎(知)에서 출발해 좋아함(好)과 즐김(樂)으로 발전합니다. 이를 2300년 뒤 독일 철학자 칸트의 3대 주저의 사유구조와 비교할 때 더 흥미롭습니다. 똑같이 앎에서 출발하지만 칸트의 사유는 진리(진), 윤리(선), 미학(미)이라는 3가지 범주로 수평 분할됩니다. 반면 공자는 앎(知)에서 애호(好)를 거쳐 향유(樂)로 수직적으로 심화됩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앎은 이성-감정-실천을 거치며 발효된다는 뜻입니다.


칸트철학이 분석적이고 구조적이라면 공자사상은 실천적이고 심미적입니다. 이는 원문의 지시대명사 지(之)를 공자가 좋아하는 시문과 음악으로 바꿔 대입해보면 뚜렷이 다가섭니다. 시문과 음악의 개념과 작법을 머리로 이해하는 사람은 좋은 시문과 아름다운 음악을 찾아 읽거나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또 시와 음악의 애호가라도 직접 시를 짓고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을 이길 순 없습니다.


이는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태도에서도 확인됩니다. 세계적 무용수나 음악가들이 내한공연을 할 때 당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관객이 그들의 공연을 얼마나 고난도의 테크닉을 구사하느냐 중심으로 보기에 박수에 매우 박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관객은 예술을 머리나 눈으로만 이해하지 해당 예술을 직접 도전해본 경험이 없어서입니다. 반면 서구권 관객은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해당 예술을 직접 체험한 본 이들이 많기에 조금만 어려운 기예를 펼쳐도 감탄하고 갈채를 보내는 것입니다.


조선 정조 때 문장가 유한준(1732~1811)이 당대 최고의 예술품 컬렉터였던 김광국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에 부친 발문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보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때에 모으는 것은 닥치는 대로 모으는 것과 다르리라(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여기서도 첫머리에 앎(知)이 오지만 그다음으로 차례로 애호(愛), 안목(看), 수집(畜)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안목과 수집은 컬렉터에겐 향유에 해당하는 실천이라 할 것입니다.


이렇듯 공자에게 앎은 머리로 터득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깊이 품어낼 수 있어야 하고 끝내는 몸으로 풀어낼 수 있어야 진정한 앎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배움(學)이 머리로 아는 것이고 습(習)이 몸으로 풀어내는 것이라면 열(說)은 그 둘을 연결 짓는 과정의 기쁨을 마음 깊이 품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앎이란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합치시키는 지행일치(知行一致)를 통해 완성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학금사양(學琴師襄)의 고사 속 공자의 모습에서 이를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노나라 악사 사양자에게 거문고 곡을 하나 배운 공자는 다음 곡으로 넘어가자는 권유에도 계속 연습에 매진하더니 “주문왕의 모습이 보인다”라고 했는데 실제 그 곡이 문왕의 덕을 칭송한 ‘문왕조(文王操)’라는 작품이었다는 내용입니다. 곡조와 연주법을 배운다고 그 곡을 안 것이 아니라 그 곡에 심취해 그 정수를 연주해내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진정 안다고 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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