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편 옹야(雍也) 제18장
공자가 말했다. “형상이 언어보다 승하면 촌스럽고, 언어가 형상보다 승하면 번잡하다. 언어와 형상이 조화를 이룬 뒤라야 군자답다고 할 수 있다.”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
자왈 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연후군자
‘3가지 차원의 문(文)’에서 말씀드렸듯이 질(質)은 본바탕, 실체를 말하고 문(文)은 무늬, 문채 꾸밈이라는 뜻과 신령스러운 내면의 힘이란 뜻 그리고 글월이란 뜻을 함께 갖습니다. 그렇다고 질과 문의 관계를 본바탕과 꾸밈새, 또는 실질과 형식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만 이해해선 안 됩니다.
질과 문에는 그 이상의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질이 형상이라면 문은 그걸 지칭하고 수식하는 언어를 말합니다. 거기엔 언어학자 소쉬르가 말한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차이 이상의 것이 존재합니다. 문은 단순히 형상의 이름이 아니라 그 본질을 꿰뚫는 상징적이고 주술적 힘을 함께 갖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는 시의 구절이 함의하는 힘입니다.
그렇기에 공자는 질보다 문을 우위에 뒀습니다. 그 둘이 조화를 이룬 상태를 질문빈빈(質文彬彬)이 아니라 문질빈빈(文質彬彬)으로 포착한 이유입니다. 질이 승한 경우를 야(野)로, 문이 승한 경우는 사(史)로 표현한 데서도 이는 발견됩니다.
야는 촌스럽다, 조야하다는 뜻이고 사는 점치고 제사 모시는 관직에서 파생했으니 유(儒)와 진배없는 표현입니다. 즉 공문에서 글 좀 배웠다고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식이라고 풍자한 것입니다. 촌놈보단 낫지만 겨우 군자흉내만 낸다는 취지로 쓴 것입니다.
이러한 문의 우월성은 어진 정치가 문덕의 정치와 연결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덕의 정치는 단순히 본바탕을 구현해내는 정치가 아니라 그것의 본질을 꿰뚫어버림으로써 본바탕 이상의 것을 구현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어가 형상과 동떨어져 버린다면 그러한 힘은 전혀 발휘될 수가 없습니다. 말과 실체가 따로 노는 형국이니 공자가 강조한 언행일치의 테마와 정자정야의 테마에 위배됩니다. 언어의 타락으로 문덕이 패덕으로 전락하게 되는 셈입니다.
맹자와 주자는 이를 간과했습니다. 맹자 같은 도덕주의자나 주자 같은 추상주의자는 이분법의 사고에 능합니다. 그래서 질과 문을 본바탕과 꾸밈새, 실질과 형식의 이분법으로만 파악해 문의 우월성을 암시한 공자의 메시지를 놓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군자는 바탕에 충실해야 하거늘 그걸 포장하는 문채가 어찌 필요하단 말입니까?"라고 했던 위나라 대부 극자성의 발언(12편 ‘안연’ 제8장)에 경도되는 해석을 내놓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