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공야장(公冶長) 제8장
맹무백이 물었다. “자로는 어진 사람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거듭 물으니 공자가 말했다. “중유(자로)는 전차 1000대를 동원할 수 있는 나라의 군사를 통솔할 수는 있겠지만 그가 어진 지는 모르겠습니다.”
“염구는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1000호쯤 되는 읍과 100대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는 나라의 기재를 맡을 수 있겠지만 그가 어진 지는 모르겠습니다.”
“공서적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공서적은 예복을 입고 조정에 나가서 빈객을 접대하는 외교업무를 맡을 수는 있겠지만 그가 어진 지는 모르겠습니다.”
孟武伯問: “子路仁乎?” 子曰: “不知也.” 又問子曰: “由也, 千乘之國,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맹무백문 자로인호 자왈 부지야 우문자왈 유야 천승지국 가사치기부야 부지기인야
“求也何如?” 子曰: “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구야하여 자왈 구야 천실지읍 백승지가 가사위지재야 부지기인야
“赤也何如?” 子曰: “赤也 束對立於朝 可使與賓客言也 不知其仁也.”
적야하여 자왈 적야 속대립어조 가사여빈객언야 부지기인야
맹무백(맹유자)은 맹의자의 아들로 노애공 14년(기원전 481년) 맹의자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맹손씨 가문의 10대 종주가 된 인물입니다. 맹손씨 가문은 삼환 중에서 공자에게 가장 우호적이었습니다. 맹무백의 할아버지 맹희자는 죽을 무렵 공자의 진가에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고, 아버지 맹의자는 공자를 스승으로 섬겼기에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맹무백은 노애공이 월나라와 손잡고 삼환을 치려하자 공자가 죽고 1년 뒤 삼환의 변을 일으켜 노애공을 위나라로 쫓아낼 정도로 불손하고 포학한 인사였습니다. 공자가 결코 높이 평가할 위인이 못 된다는 소리입니다. ‘춘추좌전’에는 맹유자 설(孟孺子 泄)이라고 나오는데 ‘맹씨 가문의 젖먹이 대부 설사똥’이란 함의가 담겼습니다.
위의 대화는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온 뒤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계강자가 염구를 가재로 삼고 공문의 인재를 잇달아 등용하자 라이벌인 맹무백 역시 공문의 인재를 등용하려고 이리저리 떠보는 질문을 던진 듯합니다. 나이 순으로 자로, 염구, 공서화에 대해 차례로 질문하자 공자는 각각 천승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국(천승국)의 장군, 백승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는 대부의 가재, 제후국을 찾아온 빈객을 접대할 외교관의 재목이라고 답합니다.
흥미롭게도 천승국의 장수가 돼 대부 반열에 오른 사람은 자로가 아니라 염구였습니다. 공서화 역시 노나라의 외교관으로 활약하게 됩니다. 반면 자로는 마지막에 위나라 집정대부인 공회를 섬기다 비명횡사했으니 백승가의 가재를 넘지 못했습니다.
그럼 공자의 사람 보는 눈이 틀린 걸까요? 그보다는 당시 제후들이 제대로 된 인재를 발탁하기보다는 입안의 혀처럼 구는 예스맨들만 선호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맹무백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지 군자학의 최고 가치가 어짊(仁)이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명의 제자가 어진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왠지 거기엔 냉소가 깔려 있는 듯합니다. ‘공문에서 어짊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한다는데 그럼 과연 당신의 정상급 제자들은 어짊은 담보할 수 있는 거냐고?’고.
공자는 제자들의 재능에 대해선 답하면서도 어짊에 대해선 “모르겠다”로 일관합니다. 계강자의 수하였던 계자연이 자로와 염구에 대해 대신(大臣)이 될 만한 재목이냐고 물었을 때 “대신까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신하 구실은 할 만하다”(11편 ‘선진’ 제23장 )고 답했던 것과 결이 좀 다릅니다.
왜 모르쇠 전략을 쓴 걸까요? 다짜고짜 어짊을 걸고 넘어진 맹무백의 질문이 불쾌해서였을까요? 물론 그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짊은 공자 자신도 성취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그렇기에 제자 중에 이미 어짊을 성취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기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 어짊은 구체적 통치행위를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습니다. 어짊은 과학적 지식인 도를 깨쳤는지 여부로만 평가할 수 없습니다. 또 윤리적 인품인 덕을 갖췄느냐 여부만으로도 평가할 수 없습니다. 국가 대소사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봐야 비로소 그 둘이 어떻게 조화를 이뤘는지 평가가 가능합니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공자의 답은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 중 하나였던 맹무백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가는 답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공자의 답변에는 ‘내 제자들이 어진지 아닌지는 그들이 나랏일을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있지 않기에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당신은 그런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당신이 어진지 아닌지는 내가 답할 수 있다. 당신이 어진지 아닌지에 대해선 왜 묻지 않는가?’ 맹무백이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벌떡 일어나 식은땀을 흘리게 만드는 비수 같은 대답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