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일
어린이는 근대에 재발견된 존재다. 산업화와 더불어 중세까지만 해도 '작은 어른' 취급을 받던 어린이에 대한 노동착취가 극심해지자 이를 막기 위해 19세기경 어린이 개념을 새롭게 범주화한 것이다. 어린이날이 제정된 것도 하루 10시간 넘게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어린이에게 하루라도 꿀맛 같은 휴식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와 더불어 어린이는 진보의 아이콘이 됐다. 진보주의는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란 믿음이 투영돼 있는데 어린 일꾼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자와 맞물렸기 때문이다. 1920년대 한국에서 불기 시작한 어린이 운동도 이런 진보세력의 꿈과 희망이 투영된 결과였다. 5월 5일이 어린이날로 제정되는 데는 진보세력의 예수나 다름없는 마르크스의 탄생일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과거의 진보적 주장이 오늘날 당연한 현실이 되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오늘날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정치인이라면 어린이를 껴안고 사진을 찍는 것 역시 19세기 노동운동의 산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우민은 생각한다. 심지어 무자비한 킬러들조차 "어린이와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다"가 불문율이 된 세상이 되지 않았는가. 우민은 궁금하다. 어린이날 기념식을 폼함해 과거 노동운도의 성과는 마음껏 즐기면서 노동운동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한국의 대통령은 과연 이런 역사를 알기나 하는지.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어린이가 꿈 많고 천진난만한 존재라는 생각 또한 어린이를 신화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이는 우리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다만 어른들과 달리 그걸 잘 숨기지 못할 뿐이다.
게다가 요즘 어린이의 미래는 결코 과거와 같은 장밋빛이 아니다. 치열한 입시경쟁에도 취업조차 힘든 미래가 기다리고 있기에 그들은 꿈 많은 존재가 아니라 꿈을 잃은 존재가 된 지 오래다. 설사 꿈이 있다 해도 부모의 열망이 투영된 것에 불과하다. 일찍이 캘빈&홉스의 캘빈이 일갈했듯이 "제 꿈은 재벌 2세가 되는 것인데 아버지가 도통 협조해주질 않는다"는 냉소적 풍자가 더 들어맞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 개념의 혁신이 발생했던 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 '무지개'의 그 유명한 구절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구절을 우민은 곱씹어본다. 중세 도덕주의를 대표하는 주희는 "아버지 나를 생성케 하시고 어머니 나를 키우셨다(父生我身 母鞠吾身)"라고 선포했다. 대다수 사람들 역시 어른이 어린이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당연시한다. 하지만 19세기 철학자 니체가 갈파했듯이 "아기를 낳아야 아버지라는 존재가 될 수 있기에 아들이 아버지보다 선행한다"는 역설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제 어린이날의 의미도 새롭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우민은 생각한다. 그저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날을 떠나 어른들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서 어린이를 유심히 관찰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물론 이날 하루 주인이 된 어린이를 섬기느라 정작 부모들은 그럴 겨를이 없겠지만.
#우민은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인 동시에 '또 하나의 백성(又民)'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제 자신에게 붙인 별호입니다. 우민일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플레인'에서 벗어나보자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