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탁의 진면목

3편 팔일(八佾) 제24장

by 펭소아

위나라 국경지대인 의(儀)라는 성읍의 관리가 “이곳까지 온 군자를 내 아직 만나 뵙지 못한 적이 없소”라며 공자를 뵙기를 청했다. 제자들의 안내로 공자를 만나고 나온 그가 말했다. “제자분들은 무엇 때문에 상실감을 느끼시는 겁니까?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어 하늘이 장차 선생님을 세상을 일깨울 목탁으로 삼으시려 하거늘.”


儀封人請見曰: “君子之至於斯也, 吾未嘗不得見也.”

의봉인청현왈 군자지지어사야 오미상불득현야

從者見之. 出曰: “二三子何患於喪乎? 天下之無道也久矣, 天將以夫子爲木鐸.”

종자현지 출왈 이삼자하환어상호 천하지무도야구의 천장이부자위목탁



‘세상의 목탁이 된다’는 표현의 출전이 ‘논어’ 임을 일깨워주는 장입니다. 여기서 목탁(木鐸)은 불공드릴 때의 그 목구가 아닙니다.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시기를 보통 기원 전후 무렵인 전한 시기로 봅니다. 공자는 그 500년 전 사람이니 이때의 목탁은 고대 중국의 관리들이 백성에게 법령과 정책을 알릴 때 흔들던 종을 말합니다. 방울은 금속이지만 그 안에서 소리를 내는 추를 나무로 만든 것이 목탁이고 금속으로 된 것은 금탁(金鐸)이라 하는데 금탁은 군대를 통솔할 때 썼다고 합니다.


공자의 비범함을 꿰뚫어 본 익명의 위나라 관리가 자신에게 익숙한 기구에 빗대 공자가 세상에 큰 가르침(宗敎)을 펼칠 큰 스승(宗師)이 될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사람을 바르게 일깨워 이끄는 사람’을 목탁으로 부르게 된 것이니 불공도구와 상관없는 표현인 것입니다.


원문의 이삼자(二三子)는 제자들을 일컫는 표현이고 부자(夫子)는 대부의 벼슬을 지낸 사람에 대한 경칭이니 공부자, 곧 공자에 대한 경칭입니다. 하환어상호(何患於喪乎)에 대해서는 노나라 대부를 지내다 쫓겨나다시피 한 공자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공자가 관직을 잃은 것에 대해서 어찌 걱정하느냐”로 의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보다는 13년간의 천하주유가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무엇 때문에 상실감을 느끼는가”로 번역해 봤습니다. 단 한번 만나봤음에도 공자가 당대보다 후대에 빛을 발할 것임을 내다봤으니 비록 그 나라는 미약했으나 거백옥, 축타, 공숙문자, 공문자, 왕손가에 이어 자공, 상앙, 오기 등을 배출한 위나라에는 참으로 인재가 풍부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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