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일은 탓하지 말라고?

3편 팔일(八佾) 제21장

by 펭소아

노애공이 재아에게 토지신인 사(社)에 대해 물었다. 재아가 말했다. "하나라 사람은 소나무를 썼고, 은나라 사람은 측백나무를 썼고, 주나라 사람은 밤나무를 썼는데 ‘백성을 전율케 하기 위함이었다’고들 합니다.“ 공자가 이를 듣고 말했다. ”이뤄진 일은 말하지 않고, 끝난 일은 간하지 않고, 지나간 일은 탓하지 않는다."


哀公問社於宰我. 宰我對曰: “夏后氏以松, 殷人以栢, 周人以栗, 曰: ‘使民戰栗.’”

애공문사어재아 재아대왈 하후씨이송 은인이백 주인이율 왈 사민전율

子聞之曰: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

자문지왈 성사불설 수사불간 기왕불구



사(社)는 특정 지역을 관장하는 토지신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제사를 올리는 별도의 사당을 짓지 않고 영험한 나무 주변에 담을 두르고 나무 앞에서 제사를 올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네를 관장하는 신이 신목에 깃든다고 믿은 한국의 서낭당 신앙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실이 제사를 모시는 수도를 중심으로 하는 토지신인 동시에 그 왕국 전역에서 가장 힘이 센 토지신인 것입니다.


재아의 설명에 따르면 그 신목으로 하나라는 소나무, 은나라는 측백나무, 주나라는 밤나무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나라가 밤나무를 신목으로 삼은 것은 밤나무의 한자어 율(栗)이 두려워 벌벌 떠는 ‘전율(戰慄)’의 율(慄)과 발음이 같다는 점에 착안해 백성을 벌벌 떨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설명이 붙습니다.


이 설명에 대해서는 말재간이 뛰어난 재아가 일종의 언어유희를 펼친 것인지 아니면 백성들 사이에 속설로 퍼진 이야기를 옮긴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렸습니다. 다만 고대에는 사의 뒤뜰에서 사형범의 처형이 이뤄졌다는 주석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주석서는 이 사를 종묘사직의 사직(社稷)과 동일시합니다. 하지만 이는 후대의 착종입니다. 하은주 시대에는 천자뿐 아니라 모든 제후국은 자신들의 조상신을 모시는 묘당이 있었습니다. 은나라 아래 제후국이었던 주나라 공실의 묘당이 사직이었습니다. 주나라 공실은 요순시절 농업장관에 해당하는 후직(后稷)의 직책에 있었던 희기(姬棄)의 후손을 자처했기에 토지신인 사와 후직을 함께 모신다 하여 사직으로 칭했던 것입니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무너뜨린 뒤 자신들의 근거지인 호경(지금의 산시성의 성도인 시안)을 수도로 삼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원의 판도를 보면 호경은 서쪽에 크게 치우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경에서 동쪽으로 약 400㎞가량 떨어진 곳에 새로운 성읍을 만듭니다. 바로 낙읍(지금의 허난성 뤄양)입니다.


낙읍에는 정복민인 주나라 백성뿐 아니라 피정복민인 은나라 백성도 이주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가운데 궁궐을 중심으로 주나라에 가까운 서쪽에 주나라 조상신을 모시는 묘당(후대의 사직)을 설치하고 은나라에 가까운 동쪽에 은나라 조상신을 섬기는 묘당(후대의 종묘)을 설치합니다.


주나라가 동천한 동주시대의 수도인 낙양이 바로 이 낙읍입니다. 그러면서 서쪽의 사직은 토지신과 오곡의 신을 모시는 묘당이 되고 동족의 종묘는 주나라 왕실의 묘당이 된 것입니다. ‘예기’에 따르면 천자는 7대까지 제사를 모시는데 동주시대가 되면 더 이상 은나라 조상에 대한 제사를 모실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후대에 전해져 궁궐을 중심으로 봤을 때 좌조우사(左祖右社)의 전통이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고려 성종 때 이를 처음 받아들여 개경 서쪽에 사직단을 동쪽에 종묘를 설치했고 조선의 수도 한양에도 서쪽 사직단, 동족 종묘가 세워지게 됩니다. 가만히 그 기원을 생각해 보면 결국 사직단에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주나라의 시조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 되고 마니 참으로 허망한 사대주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문에서 은나라 사람은 은인(殷人), 주나라 사람은 주인(周人)이라 하면서 하나라 사람은 왜 하후씨(夏后氏)라고 했을까요? ‘춘추좌전’의 저자인 좌구명이 춘추 8개국의 역사를 정리한 ‘국어(國語)’에는 하나라의 시조인 우(禹)가 치수에 성공하자 순임금이 그에게 사(姒)란 성과 유하(有夏)라는 씨를 하사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전의 제후는 씨족 명을 국명으로 삼았기에 우는 하후(夏后)가 된 것입니다. 그가 천자가 되면서 왕국명이 하(夏)가 됐고 그 아들인 사계(姒啓)에 의해 하왕조가 들어서면서 그 백성들을 하후 씨족이라 하여 하후씨로 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이 남았습니다. 사의 신목에 대한 재아의 설명을 전해 들은 공자의 반응을 해석하는 일입니다. ”이뤄진 일은 말하지 않고, 끝난 일은 간하지 않고, 지나간 일은 탓하지 않는다 "는 공자의 발언은 동일한 내용을 세 차례 반복한 것입니다. 원문의 성사(成事)와 수사(遂事), 기왕(旣往)이 동일한 사태를 말하고 설(說)과 간(諫), 구(咎) 역시 같은 뜻을 지닙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왈가왈부하지 않는다라는 뜻을 강조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럼 여기서 ‘엎질러진 물’은 뭘까요? 2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주나라가 백성을 겁주기 위해 밤나무를 사의 신목으로 삼았다는 것과 재아가 그것을 경박하게 언급한 것입니다. 대다수의 주석서는 재아가 고래의 예에 대해 함부로 말장난을 펼친 것을 경계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어진 정치를 모범으로 삼아야 할 노애공에게 백성을 벌벌 떨게 만드는 것이 상고의 정치인 것처럼 각인시키는 우를 범한 것을 에둘러 비판했다는 것입니다.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상록수로 항상 푸르름을 유지하기에 지조 있는 나무라는 상징성을 지닙니다. 측백나무는 여기에 신비로운 향이 더해집니다. 반면 밤나무는 이와 달리 활엽수이자 과실수입니다. 실용성을 중시한 주나라 사람들이 백성을 전율하게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백성의 삶에 실질적 도움을 주자는 취지로 밤나무를 신목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거론하지 않고 굳이 백성을 벌벌 떨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속설을 취해 군주를 오도하느냐는 비판입니다.


이와 관련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공자가 송백만 콕 찍어서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한국에선 잣나무로 통용됨)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9편 ‘자한’ 제28장)라는 찬사를 남긴 점입니다. 반면 밤나무에 대한 공자의 언급은 ‘논어’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공자도 밤나무를 신목으로 정한 것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지사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다는 말을 3번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대차게 비판하려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를 모두 감안하면 공자의 발언이 겨냥한 것은 중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래의 전통을 언급하면서 굳이 속설을 취한 재여의 발언이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원칙에 어긋난다 비판하는 동시에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백성의 공포심을 정치에 이용하려는 것을 함께 비판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둘 중 하나를 겨냥했건 둘 모두를 겨냥했건 여기서 분명해진 것이 있습니다. 공자의 마지막 발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기왕지사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는 처세술의 교훈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편찬에 참여한 ‘춘추’나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공자의 발언을 돌이켜보면 기왕지사를 그냥 덮고 넘어가기보다 그 시시비비를 밝히는 쪽을 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장의 내용은 지나간 일에 대해 말하는 것 자제하되 반드시 지적할 것은 지적하고 넘어가라는 뜻으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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