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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Sep 17. 2023

吾從周에 함축된 공자의 결단

3편 팔일(八佾) 제14장

  공자가 말했다. "주나라는 하나라와 은나라 2대를 거울로 삼아 찬란한 문(文)의 정치를 펼쳤도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련다."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자왈    주감어이대   욱욱호문재   오종주



  중국 역사가 이중톈은 은상과 주나라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이중톈 중국사’ 3권). “상나라는 중국의 디오니소스였고, 주나라는 중국의 아폴론이었다. 그래서 상나라는 활달하고 주나라는 이성적이었으며 또 상나라는 낭만적이고 주나라는 근엄했다. 그리고 상나라는 무관(巫官‧샤먼)을 중시한 반면 주나라는 사관(史官)을, 상나라는 귀신을 중시한 반면 주나라는 인간을 중시했다.” 또 은상의 예기(禮器)가 대부분 주기(酒器)인 반면 주나라의 예기는 대부분 식기(食器)라는 점을 대비하며 “상나라인은 술귀신, 주나라인은 밥귀신”이라고도 밝혔습니다.

    

  공자는 은상의 후예였습니다. 그의 조상은 은상의 후손인 미자 계(자계)에 봉분된 송나라출신입니다. 구체적으로 송나라 사마로 있던 공보가(孔父嘉)가 공자의 6대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보가는 송나라의 병권을 쥔 사마였고 아내가 천하절색이었다고 하니 남부러울 게 없던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공보가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은 또 다른 송나라 대부 화보독((華父督)이 난을 일으켜 공보가는 물론 제후이던 송상공까지 시해하고 송상공의 동생인 송장공을 세웁니다. 이때 겨우 살아남은 공보가의 후손이 노나라 공 씨의 시조가 됐다고 합니다. 자계의 후손이니 성(姓)은 자(子)이지만 공보가를 시조로 삼는 공(孔)씨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공자는 은상의 후예답게 음주가무에 능통했습니다. 술은 두주불사였고, 음악과 춤에 정통했습니다. 또 그의 어머니가 니구산의 무당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죽을 때도 은상의 예를 적용해 상을 치러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타고난 본성(nature)은 은상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체적 학습(nurture)을 통해 주나라의 합리주의적 문화(culture)를 선택하고 흡수합니다. 공자는 이를 문(文)으로 통칭합니다. 文은 무력이 아니라 글월의 힘을 뜻하는 문덕(文德)을 말합니다. 동시에 그에 근거한 문물제도와 소프트파워를 아우르 문화(文化)이기도 합니다. 또 글로 기록된 역사(史)와 그에 기초해 성립된 제도와 질서를 뜻하는 예(禮)의 가치에 기반한 정치체제를 뜻하기도 합니다. 

     

  공자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천성(nature)에 맞는 디오니소스적 길을 고집하지 않고 주체적 학습(nurture)을 통해 아폴론적 길을 택한 것입니다. 원문의 ‘오종주(吾從周)’에 함축된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본성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성과 학습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했다는 말이 정확합니다. ‘하나라와 은나라 2대를 거울로 삼아(監於二代,)’라는 표현이 이 변증법적 통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주나라적인 예와 은상적인 악을 결합한 예악(禮樂)과 ‘흥어시, 입어례, 성어악(興於詩, 立於禮, 成於樂)’이란 표현 또한 낭만적 은상과 근엄한 주의 결합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공자의 궁극적 선택으로서 군자학은 은상의 nature와 주나라의 nurture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벼려낸 signature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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