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1일(맑고 추움)
우민이 생각하기에 유독 한국 야구계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표현으로 "야구, 몰라요"와 "야구는 리듬의 스포츠다"가 있다. 전자는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자신들의 에측이 틀렸을 때 "야구는 워낙 변수가 많아서 예측이 쉽지 않다"고 둘러대는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저 표현을 유행시킨 사람이 하일성과 허구연 같은 야구 해설가 출신이란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럼 축구나 농구, 배구는 예측이 쉽나?
"야구, 몰라요"를 대신할 수 있는 표현은 따로 있다. 메이지리그 포수 출신의 요기 베라가 남긴 불세출의 명언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이다. 아무리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더라도 언제든 역전이 가능한게 야구의 묘미임을 갈파한 표현이다. 그래서 경기에 지고 있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게 만든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도 그와 비슷한 표현이 있다. "야구는 희망의 스포츠"라는 표현이다. 우민은 어느 책에선가 읽고 "세상에 희망 없는 스포츠도 있던가?" 하며 냉소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긍하게 됐다. 승리에 대한 실낱 같은 희망을 갖고 경기에 임하는 것은 모든 스포츠의 공통점이다. 하지만 경기시간이 가장 길면서도 9회말 투아웃, 마지막까지 그 기대를 놓치 않게 만드는 스포츠가 또 야구다(경기시간이 가장 긴 스포츠는 크리켓이지만 이 역시 야구의 사촌이다).
게다가 야구는 집 나갔던 선수가 집으로 돌아와야 끝이 난다. 안타를 치고 주루에 나간 주자가 홈을 밟아 점수를 내야만 승부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나간 자식들이 언제가 집으로 돌아와 줄 것이란 부모의 희망이 야구라는 스포츠에 투영돼 있다.
"야구가 희망의 스포츠"라는 표현이 야구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전략적 표현이라면 "야구는 리듬의 스포츠"는 경기 중에 적용되는 전술적 표현이다. 지고 있더라도 상대의 실수(에러)를 틈 타 점수를 내면 역전의 희망이 생긴다. 또 이기고 있더라도 점수를 내야할 때 내지 못해 달아나지 못하면 덜미를 잡힐 수 있다. 그래서 지고 있는 팀도 항시 반전의 기회를 노리고,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는 팀도 추가점을 내려고 애쓰게 만든다.
"야구, 몰라요"가 해설진을 위한 표현이고 "야구는 희망의 스포츠"라는 표현이 선수와 팬을 위한 표현이라면 "야구는 리듬의 스포츠"라는 표현은 벤치의 감독을 위한 표현이다. 야구 게임 자체는 선수들이 풀어가지만 잘 풀리지 않을 때 중간에 개입해 그 리듬을 바꾸는 것이 감독의 몫이기 때문이다. 선발투수를 언제 교체할지, 대타를 언제 기용할지, 히트앤드런이나 번트처럼 인위적 작전을 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모두 시합의 리듬을 바꾸려는 몸부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런 감독의 개입은 경기의 리듬을 바꿀 때로 최소화해야 한다. 습관적으로 개입하다 보면 자연스러운 야구의 리듬을 깨드리기 때문에 역효과를 내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우민의 생각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별 선수들의 당일 컨디션과 마음가짐을 읽어내 타순을 짜고 선발진을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당연히 리듬감이 중요하다.
야구에서 루틴에 의존하고 징크스를 피하려는 경우가 유독 많은 것도 이때문이다. 리듬감을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야구 감독은 선수보다 고려할 변수가 더 많다. 그래서 루틴에 더 많이 의존한다. 선발투수를 다섯 명으로 고정하고 이기고 있을 때 낼 외양간투수들을 '필승조'라는 이름으로 묶어두려 한다. 또 1, 2번은 발빠르고 타율 놓은 선수를 배치하고 3, 4, 5번 중심타선엔 힘 좋고 타점 생산력이 좋은 선수를 고정적으로 배치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장기적 레이스를 펼칠 때는 이렇게 고정된 루틴을 따르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시즌 막판 순위가 결정되는 시합이나 '가을야구'를 펼칠 때는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고 선수 개개인의 리듬에 맞춤형 작전을 들고나올 줄 알아야 한다. 이걸 잘하는 감독이 '명장'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진짜 머리가 좋은 감독은 경기 중간에 설치기 보다는 경기 전에 라인업 짜는 것에 강하다. 또 페넌트 레이스 때는 '믿음의 야구'로 포장된 '게으른 야구'를 펼치다가도 단기전에 돌입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상대의 허를 찌르는 '깜짝 카드'를 잘 꺼내는 감독이다. 그런 감독이 누구냐고? 자신이 좋아하는 팀 감독의 성향을 잘 관찰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고 우민은 생각한다.
"야구는 리듬의 스포츠"라는 이 표현을 무력화시키는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홈런이다. 홈런은 감독의 개입 없이도 시합의 리듬을 순식간에 바꿔놓는다. 지고 있는 팀에겐 희망을 갖게 만들고, 이기고 있는 팀에겐 지지 않을 것이란 희망을 갖게 만든다. 감독들이 대타 카드를 쓸 때 홈런을 잘 치는 대형 타자를 기용하는 이유도 홈런이 가장 큰 리듬 교란종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홈런은 "야구는 희망의 스포츠"라는 전략적 표현에 부합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단순히 경기의 흐름을 바꿀 뿐 아니라 집 나갔던 아이가 집으로 돌아와야 끝난다는 야구의 본질을 벼락처럼 깨닫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홈런이야말로 불가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의 죽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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