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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Mar 07. 2021

불혹 vs.불견오

17편 양화(陽貨) 제26장

  공자가 말했다. “나이가 사십이 되어서도 미움을 받는다면 마지막도 그렇게 끝날 것이다.”     

  

  子曰: "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

  자왈    년사십이견오언   기종야이          

  


  무시무시한 표현입니다. 나이가 사십이 됐는데도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는다면 더 볼 거 없는 인생이라니요. 대한민국에서 이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몇 프로나 될지 의문입니다. 정치인으로 좁혀서 생각해봐도 나이 사십 넘은 정치인 중에 과연 누구로부터도 미움받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이 때문에 見惡를 ‘미움을 받다’는 ‘견오’가 아니라 ‘악함을 드러내다’는 ‘현악’으로 새겨야 한다는 분도 계십니다. 사십이 돼서도 얼굴에 악한 기운을 표출한다면 더 볼 거 없다는 겁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여기서도 문제가 발견됩니다. 見을 ‘드러낼 현’으로 새긴다면 속에 악함을 갖추고 있는데 드러내지 않게 조심하라는 뜻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악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잘 감춰야 성공한 인생이란 소리이니 이 또한 거대한 위선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이란 책에서 혹시 이 대목을 다룬 게 있을까 해서 읽어봤습니다. 없었습니다. 나이 마흔과 관련해 공자의 발언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게 불혹(不惑)입니다. 미혹됨이 없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공자가 자기 자신을 돌아봤을 때 마흔이 되면서 더 이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한 것입니다. 공자의 경지를 소인인 우리들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노릇인데 많은 이들이 이를 인용하며 “나는 마흔이 됐는데도 왜 유혹에 흔들리는가?”라며 통탄합니다.     


  하지만 불혹보다 더 어려운 것이 불견오(不見惡) 아닐까 합니다. 유혹에 흔들리고 흔들리지 않는 것은 내 안의 문제지만 미움받지 않는 것은 나와 타인 전체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불혹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누군가의 눈에는 그것조차 엄청 잘난 척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나의 진심이 타인에게 늘 통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따라서 불견오의 경지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나와 적대적 관계에 놓인 사람, 나와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얽힌 사람, 나를 직접 접하진 않고 두 다리 이상 건너서 아는 사람을 제외한 이들을 말합니다. 최소한 나를 잘 알고 가까이서 지켜봐 온 사람들로부터 미움받는 존재가 되선 안 된다는 소리입니다.


  이 역시 쉽지는 않지만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 이룰 순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 직장동료, 거래처 사람들 중에 나랑 생각이 다르고, 선악판단이 다르고, 호오판단이 다르고, 미추판단이 다른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로부터 “나랑은 여러 모로 다르긴 하지만 미워할 순 없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동의는 못해도 신뢰할 순 있다”는 평판을 얻는 사람이 제법 되는 것이 또 우리네 인생입니다. 심지어 “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말을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걸 목표로 사는 건 가능합니다. 나침반은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지만 매번 파르르 흔들거립니다. 어쩌면 그렇게 조금씩 흔들리며 살아가는 게 인생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그렇게 흔들릴지언정 나와 타인에게 거짓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만큼은 꺾이지 않는 나이. 비록 불혹의 경지엔 이르지 못했지만 불견오의 경지엔 근접했다는 자부심을 갖춘 나이. 마흔은 그런 나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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