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편 양화(陽貨) 제24장
자공(단목사)이 물었다. “군자도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미워하는 것이 있다. 남의 나쁜 점을 들춰내는 것을 미워한다.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헐뜯는 것을 미워한다. 용감하지만 무례한 것을 미워한다. 과감하지만 꽉 막힌 것을 미워한다.”
공자가 말했다. “단목사아,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
“저는 어쩌다 얻어들은 것을 지혜로 여기는 것을 미워하고, 불손한 것을 용기라 생각하는 것을 미워하고, 남의 허물을 고자질하면서 올곧다고 여기는 것을 미워합니다.”
子貢曰: "君子亦有惡乎?"
자공왈 군자역유오호
子曰: "有惡. 惡稱人之惡者, 惡居下流而訕上者, 惡勇而無禮者, 惡果敢而窒者."
자왈 유오 오칭인지악자 오거하류이산상자 오용이무례자 오과감이질자
曰: "賜也亦有惡乎?"
왈 사야역유오호
"惡徼以爲知者, 惡不孫以爲勇者, 惡訐以爲直者."
오요이위지자 오불손이위용자 오알이위직자
자공의 영특함이 빛나는 장입니다. 자공이 공자에게 먼저 묻습니다. 군자도 미워하는 것이 있냐고. 공자가 그렇다면서 4가지를 언급합니다. 남을 험담하는 것(稱惡), 윗사람을 헐뜯는 것(訕上), 용감하다면서 무례한 것(無禮), 과단성 있다면서 꽉 막힌 것(窒)입니다.
가만히 보면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딱딱 맞춰 대입됩니다. 사람이 어질다면 남의 험담을 하지 않을 것이요, 의롭다면 윗사람을 헐뜯지 않을 것이요, 예를 터득했다면 무례하지 않을 것이요, 지혜롭다면 막힘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너무 교과서적 답변이라 살짝 싱겁습니다.
공자가 자공의 눈빛에서 이런 반응을 읽어냈던 걸까요?. 넌지시 묻습니다. “자공, 너는 어떠냐?” 이게 바로 ‘논어’의 묘미입니다. 스승의 답변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제자가 이를 받아 다시 화답합니다. 스승이 연주한 선율을 받되 좀 더 세련되고 생동감 넘치게 변주해내는 것이니 마치 재즈 연주를 보는 듯합니다.
자공은 3가지로 줄여서 답합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지혜인 양 떠들어대는 것(徼以爲知), 겸손하지 못한 걸 용기 있다고 착각하는 것(不孫以爲勇), 남의 약점이나 캐러 다니는 주제에 올곧다 자부하는 것(訐以爲直)입니다. 공자의 메시지와 비슷해 보이지만 자공은 그 과녁이 뚜렷합니다. 첫째는 근본 없는 헛똑똑이, 둘째는 매너 없는 무뢰한, 셋째는 시샘만 많은 비열한입니다. 각각 사이비 지(知), 사이비 용(勇), 사이비 의(義)을 겨냥한 것입니다.
공자의 언급은 군자라면 멀리해야 할 4가지입니다. 도와 덕을 쌓음에 있어 주화입마 하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자공의 언급은 그와 비슷해 보이면서도 다릅니다. 자공은 군자가 아니면서 군자 행세를 하는 위군자(僞君子)를 걸러내기 위해 필요한 시금석에 해당합니다.
자공이 미워하는 3가지는 고스란히 한국의 기자에게 적용될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공부하고 궁리해 터득한 정보보다 취재원에게서 얻어 들어 아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걸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라 착각하곤 합니다. 또 자신들보다 나이 많거나 높은 지위의 사람을 상대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너무 굽실대지 말고 대차게 행동하라 훈련받곤 합니다. 조금만 삐끗하면 무례하고 불손한 사람으로 비추기 십상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춰진 진실을 폭로한다면서 부귀명성을 누리는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사생활을 파고들 때가 많습니다. 숨기고자 하는 것을 들추다 보니 과연 그게 공익에 부합하는 내용인지 옥석을 구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공이 언급한 3종류의 위군자가 되지 않는 길은 하나뿐입니다. 진실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겸허해지고 신중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떠들고 있는 것이 스스로 터득한 자식이 아닐 수 있으니 오만하지 않은 자세로 검증하고 또 검증해야 합니다. 비굴하게 굴지 않겠다는 생각보다 겸손하게 말하고 행동하자고 생각하면 무례하게 비칠 일이 적어집니다. 폭로란 단어에 사나울 폭(暴)이 들어감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주기보다는 차분히 진실을 알리자는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그 길만이 ‘기레기’니 ‘기더기’라는 세상의 조소와 저주를 벗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