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편 양화(陽貨) 제14장
공자가 말했다. “도를 듣고 길가에서 떠드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
子曰: "道聽而塗說, 德之棄也."
자왈 도청이도설 덕지기야
보통은 도(道)와 도(途)를 큰길과 작은 길로 새겨서 ‘큰길에서 들은 이야기를 작은 길에서 떠드는 것’이라고 풉니다. 저는 도(道)와 덕(德)의 상관관계로 이 장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길에서 들은 이야기라면 중요한 이야기가 못될 겁니다. 그런 이야기라면 길에서 떠들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반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곰곰이 곱씹어 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 뒤 이를 소중히 주변 사람과 나누는 것이 덕 있는 사람의 자세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논어’ 4편 리인(里仁) 8장에 나오는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와 더불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아칭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지요. 두 구절을 비교하다 보면 문도(聞道)와 청도(聽道)의 차이가 중요해집니다. 問과 廳은 청문회(聽聞會)라는 표현에서도 나란히 등장하는데 문이 영어의 hear라면 청은 listen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聞道는 우연히 도를 들은 것이요, 聽道는 도를 경청해서 들은 것입니다.
어쩌다 도를 들으면 그날 저녁에 죽어도 원이 없겠다는 사람이 길가에서 도를 경청해 듣는다? 왠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에 많은 사람이 도를 큰 길로 해석하지 않았나 합니다. 하지만 청도의 경우는 누군가 도를 설파하는 내용을 주의 깊게 들은 것이고, 문도는 우연히 도를 접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라 풀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문도는 은총이나 복음을 받는 것처럼 은혜롭고 기쁜 일로 봐야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축복받은 내용을 함부로 길가에 떠드는 것은 자신의 복을 발로 차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됩니다.
다른 한편으론 문도의 도와 청도의 도를 다른 도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도는 사물의 이치부터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까지 다양한 분야의 원리를 통칭합니다. 바닷가의 모래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부터 치국평천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까지 저마다 다른 도가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문도의 도는 천하에 적용되는 도요, 청도의 도는 개별적 사물의 이치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와 덕의 상관관계입니다. 도는 내가 어떻게 하든 바뀌지 않는 객관적 진리입니다. 도는 내가 얻으려고 노력하든 안 하든 거기 그렇게 존재합니다. 반면 덕은 그 도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주관적 노력의 산물입니다. 다시 말해 객관적 도를 어떻게 추구하느냐 하는 주관적 태도가 곧 덕입니다.
사물의 이치가 됐건 세상만사의 이치가 됐건 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일은 아주 드물고 귀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걸 흘려들어서도 안 되지만 그걸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내 속에 소중히 간직한 채 새기고 익혀야 합니다. 새기는 것이 습(習)이고, 익히는 것이 온(溫)이니 학이시습(學而時習)과 온고지신(溫故知新)이 곧 덕인 것입니다. 따라서 도를 듣고 그걸 길가에서 떠들어대는 것은 도뿐만 아니라 덕까지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