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갑과 을?
아침에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를 당겨 받았다. 당시 사무실에는 책상마다 유선 전화기가 한 대씩 있었고, 윗분들이 자리에 계시지 않으면 아래 직원이 전화를 당겨 받는 것이 일상이었다. 발주처에서 온 전화였다.
12시 전까지 보고서 제본해서 들어오세요.
익숙한 듯 전달사항만 전하고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메모를 남겨 놓았다. 부장님은 메모를 보시더니 다급히 발주처에 전화를 돼 거는 듯 보였다. 연신 머리를 허공에 대고 조아리더니 전화기를 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발주처에서 소위 숙제라는 것을 내주었다고 하셨다.
숙제라 함은 진행되고 있는 용역(프로젝트)과 관계없이 추가적으로 발주처에서 주는 업무를 말한다.
신 과장이 한번 발주처가 들어가 볼 수 있겠어?
대관업무는 해 보았지만, 발주처에 들어가 직접 감독관을 상대한 적은 없었다. 나는 회사 앞에서 좌석버스를 타고 발주처로 들어갔다. 발주처 사무실도 우리 사무실과 마찬가지로 푹푹 찌게 더웠다. 책상마다 소형 선풍기가 한 대씩 돌아가고 있었고, 선풍기가 회전할 때마다 책상 위 정리되지 않은 서류들이 날아갈 듯 펄럭였다. 조명은 침침하고 어두웠다. L과장은 서류더미 사이를 뒤지더니 얇게 제본한 보고서를 한 권을 내주며 말했다.
이 보고서 검토해 보고 의견을 줄래요?
일본어 보고서였다. 난 일본어를 읽지 못했지만, 수식이 대부분이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요?
음… 다음 주 이 시간에 들어와요.
이렇게 숙제는 시작되었고, 난 이 숙제가 매주 나를 발주처로 불러들이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전화로 해도 될 일도 일단 사무실로 들어와 설명을 하라고 하니, 나는 매주 좌석버스를 타고 발주처로 들어갔다. 때로는 처장님께도 보고해야 하니 판넬을 만들어 오라고 했다. 이렇게 6개월 이상 발주처를 드나들며 숙제를 잘 마쳤고, 새로 발견한 결과를 이용해 사내 기술기사도 내고, 학회지 논문도 한편 냈다. 새로운 일을 맡아서 공부도 많이 했고, 그동안 L과장과 나름 친분도 쌓였다고 생각했다. L과장은 그동안 수고했다며 커피를 한잔 타주면서 말했다.
그동안 수고 했어. 이제 다음 주부터 안 들어와도 돼.
L과장은 선심 쓰듯 말이 이어갔다.
언제 다시 볼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한번 만난 갑을 관계는 끝까지 가더라고.
나는 숙제가 끝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발주처를 나섰지만 사무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지만은 않았다.
6개월 정도 지났을까?
가족들과 함께 지방으로 내려가는 길. 새로 개통된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운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익숙한 장면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나는 급히 차를 갓길에 세우자 가족들이 놀라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나는 뒤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렸다.
내가 검토하고 발견해서 제안했던 도면이 실제로 신설 고속도로에 그대로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가족들에게는 이게 내가 설계한 것이라고 자랑했다. 기쁘면서도 신기했다.
사무실에 돌아가 확인해 보니, 내가 제안했던 도면이 특허로 등록되어 있었다. 특허 개발자는 L과장과 처장이었다. 내 이름은 없었다. 그 기술은 실제로 나의 아이디어 었다. 나는 분하고 화가 났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내 공을 가로채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억울하고 분통 터질 일이다.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한 일이라고 공치사할 일도 아니다. 나는 그 일을 하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을 했고, 새로운 것을 배웠고, 기술기사도 논문도 섰다. 그것도 월급을 받아가면서 말이다.
공을 가로채는 사람의 마음은 또한 어떻겠는가? 그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보면서 나는 앞으로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반면교사를 배우면 되는 것이다.
배울 것이 많은 곳이 회사다. 수업료도 없이 월급을 받아가며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화낼 일도 없는 것 같다.
L과장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그 이후로 만난 적은 없다. L과장을 만나면 이야기해 주고 싶다.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