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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일기(단편)

북해 단기 출장

by 노르웨이신박

2025.10.31

선상일기(단편)

/ 북해 단기 출장


짧은 바다 출장을 마치고 항구로 돌아가는 길. 바닷바람이 차다. 바다 출장 일정은 예상보다 길어지는 게 보통인데, 일정보다 빨리 끝나니 이런 일도 있구나 싶다. 날씨가 많이 도와줬고, 같이 작업한 동료들은 최고의 숙련된 멤버들이었다.


북해바다에서 석유를 탐사하고 생산하기까지는 시간이 최소 7년에서 10년이 걸린다. 탐사를 위한 장비를 설치하고, 충분한 석유 매장량이 확인되면, 시추를 위한 장비를 다시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탐사와 시추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장비를 개발해 성공적으로 시공을 마쳤다.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시간을 약 5년 정도 단축할 수 있다. 패스트 트랙이다. 오프쇼어에 나갈 때 짊어지고 나갔던 무거운 짐가방을 다 풀기도 전에 다시 짐을 챙겨야 했다.


시장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에 발맞춰 설계와 시공도 빨라지고 있다. 불필요한 중간 과정이 통으로 사라지고, 개선된 스케줄을 더 효율화시키고, 한 팀이 통째로 다른 부서로 옮겨가기도 하는 유연성을 요구한다. 심지어 지반조사를 생략하고 시공과 동시에 지반상태를 파악해 설계를 변경하면서 시공하는 리얼타임 최적화 시공 방안도 제안되고 있다. 빠르게 변해가는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흐름 속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핵심 가치. 그 핵심가치를 잊고 빠른 변화에 올라타려고만 하면, 달리고는 있으나 방향성을 잃고 방황할 수 있다.


예상보다 일찍 항구에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가족 카톡 방에 남겼다. 보통은 카톡을 일씹 (때로는 안일씹) 하는 딸이 크게 실망한 목소리로 바로 연락이 왔다.


아빠... 좀 늦게 오시면 안 돼요? 배에 며칠 더 있다가 와요. 예?


엄마는 학회로 집을 비우게 되었고, 나도 바다에 나가 있으니, 집에서 할로윈 파티를 제대로 열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갑자기 할로윈 밤에 집으로 들이닥친다는 아빠의 카톡은 깜깜한 유령의 집에서 갑자기 마주친 뻐드럭이를 드러낸 드라큘라보다 더 무서웠으리라. 방에서 인기척 없이 조용히 유령처럼 있겠다는 약속을 거듭 확인한 딸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이내 집 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할로윈. 하루가 다르게 해가 짧아지며 거울 어둠이 점차 조여 오고 있는 노르웨이에서 할로윈은 큰 이벤트이다. 동네 마트에는 할로윈 장신구와 커스텀이 넘쳐나고, 뽀얀 어린아이들도 삼삼오오 새하얗게 변장한 유령 얼굴에 피를 흘리며 Trick or Treat 집집마다 문을 두드린다. 평소 지루했던 일상 가운데 한 잔의 기회를 찾고자 했던 어른들에게도 할로윈은 반가운 핑곗거리가 된다. 이러한 범 국가적 이벤트로 거리마다 반짝이는 할로윈 조명 아래 그 가치가 잊히고 있는 등불이 하나 있으니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일이다.


1517년 10월 31일. 508년 전 오늘은 마르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의 부정부패를 비난하고 95개 조 반박문을 공포하며, 교황의 권위보다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 종교개혁의 날이다. 역사 학자들은 이 종교개혁은 어둡고 부패한 중세 사회가 근대사회로 발전하는데 큰 근간이 되었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등사상, 이에 근간한 근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전에도 종교개혁은 큰 영향을 미쳤다.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를 살면서 정신없이 화려한 할로윈 불빛을 좇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작금의 시대. 할로윈에 가려저 그 귀한 가치를 잃어가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은 고리타분한 구시대적인 발상인가.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 그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힘겹게 달리고 있는 우리들. 그 속에 담겨 있는 핵심 가치를 알고 지킬 수 있다면, 때로는 빠르고 혼탁해 어디로 가는지 조차 알 수 없는 경주 속에서도 조금은 자유롭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을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차피 방 안에서 나오지 못할 오늘 밤. 혼자서 조용히 마르틴 루터 삶을 조명해 봐야겠다.


2025년 10월의 마지막 밤.

베르겐에서 오슬로 가는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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