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선상일기 - 하선 편/ 북해바다
/6/
폭싹 속았수다
임무를 마치고 베르겐 항구에 도착했다. 보통 새벽에 항구에 도착하면 아침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갈 수 있다.
항구에 늦게 도착하니 오전 비행기가 없었다. 저녁 비행기를 기다리거나 기차를 타야만 했다.
같이 온 사람들은 7시간 기차를 어떻게 타고 가냐며, 저녁 시간 비행기를 예약했다.
나는 고민 없이 기차를 선택했다. 7시간은 나에게 길지 않은 시간이였다.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왜? 나에게는 그동안 아껴둔 폭싹 속았수다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르겐-오슬로행 기찻길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찻길 중 하나다. 피오르드를 따라 피는 꽃, 절벽을 타고 내려는 폭포,
해안선과 어우러진 하양 빨강 집들, 눈 덮인 산 봉우리.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즐길 수 있는 기찻길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제주의 유채꽃만 못한 듯하다.
기차에 혼자 앉아 웃다가, 울다가, 히쭉이다, 훌쩍이고 있으니, 대각선에 앉은 노부부가 신기하게 쳐다본다.
보거나 말거나 나는 애순이와 관식이의 이야기에 쏘옥 빠져들었다. 종착역이 오슬로였기에 망정이지 스웨덴까지 가라면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이때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아들이다.
지금 친구들과 팀과제를 함께 하러 과방으로 가는 길이란다. 밤 시간에 캠퍼스를 혼자 걷고 있는데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꿈을 꾸고 있는 듯 행복하다고 한다. 볼따구니를 한번 세게 꼬집어 보라고 했다. 꿈인지 생신지...
긴 겨울을 보낸 아들의 마음에 봄이 왔나 보다..
애순이의 독백처럼 우리 삶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서 없이 찾아온다.
봄이었다가 여름을 건너뛰고 갑자기 겨울이 오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하지만, 어느 계절이 오든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봄이다. 언제나 봄이다.
차장 밖을 보니 이곳 베르겐도 기나긴 겨울을 깨고 완연한 봄이 왔다.
좋다. 아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