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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좋은사업가 Feb 25. 2020

출산휴가 시작 2주 후기 (feat. 나무늘보)

천천히 느긋하게 슬로우 슬로우…

몇 년간의 직장생활 끝에 출산휴가를 받았다. 와 앞으로 몇 개월 동안 아이를 키우는 엄마 역할만 하면 되는 건가? 친구들은 부럽다는 말부터 먼저 했다. 몸이 무거워졌기에 회사로부터 받은 출산 휴가는 너무 달콤했다. 그간 맞벌이한다는 핑계로 불성실했던 집안일과 요리 실력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5분 더 자도 되네?


제일 큰 변화는 아침에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침 7:00가 되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눈을 뜨고 화장실을 가서 씻고, 씻으면서 오늘 입을 옷을 고민하고 화장대에 앉는다. 이미 습관화된 리츄얼(ritual=의식)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을 보면서, 가만히 있는 나를 보면서 생각한다. 우와… 5분 더 자도 되는 거잖아.



 하지만 몇 년간 길들여진 습관을 이내 나를 죄책감으로 몰아넣는다. 연차 때도 할 일을 계획하면서 알차게 쓴 나에게 이유 없는 잠이란 시간에 대한 미안함이라고 할까? 30분도 안되어 일어나 식탁에 앉는다. 배가 고프다.


대학 졸업 후 9 to 6 직장인이 되라고 누가 강요하지 않았다. 그냥 내 스스로 선배들이 그렇게 했으니, 사람들이 했으니까 그렇게 살아왔다. 출산 휴가를 시작하자 마치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느긋하게 슬로우 슬로우…


내가 일을 해왔던 부서는 긴급한 일들을 빠르게 처리하는 업무들이 많았다. 타이밍이 생명인 영업직이다. 쏟아지는 메일들을 처리하면서도 일상적인(Routine) 한 업무들을 처리해야 하고, 여러 유관부서가 엮여 있어 정신줄을 놨다간 놓치는 일들이 생긴다. 습관이란 무섭다. 친구랑 백화점을 가서 화장실을 갔는데, 친구가 ‘화장실에서 왜 그렇게 빨리 나오냐고 누가 쫒아오느냐’고 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낸 나에게 빨리 빨리는 업무 성과와 직결된 필수 역량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집안일을 하는데도 하루 해야 할 일(To do list)을 적고 하나씩 클리어 해가며 뿌듯해 했다. 순간 내 자신의 이런 모습이 지쳤다. 이건 업무가 아닌데 업무적으로 쳐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토피아의 나무늘보가 되기로 했다.



하루에 1~2개의 집안일 혹은 내 일 만 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한두 가지 일에 몰두해서 천천히 깔끔하게 완수한다. 오늘의 목표는 ‘묵은지 김치찜’, 필요한 재료를 마트에 사다가 천천히 다듬고 설명서를 봐가면서 간을 맞춰가면서 요리를 하나 한다, 완수가 아닌 즐기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 아주 맛있군. 나는 요리를 못하는 줄 알았다. 안 하는 것이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삼겹살을 굽는데 귀가 열렸다. 여유가 생기니 삼겹살 굽는 소리가 듣기 좋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핸드폰을 켜서 소장용 ASMR 영상을 만들었다. 타기 전에 그만 해야겠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리 동네 정말 살기 좋다



그간 집, 회사만 다녔던 나에게 우리 동네는 마트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맛집 정도로 활용되어 왔다. 뜻밖의 시간적 여유로 돌아다닌 동네 탐방, 우리 동네는 구석구석 재미있는 공간들이 많았다. 프랜차이즈 말고도 맛있는 빵집들, 샐러드 가게, 동네 사람들의 마실 공간 미용실. 동네 미용실에서 염색을 했다. 미용실 안에는 사물함처럼 되어 있는 공간에 칸칸이 염색약들이 고객들의 이름과 함께 붙어 있었는데, 아마 단골손님들이 뿌염 할 때 사용하는 전용 헤어 컬러 인가보다. 각박한 도시에 참 정겹다. 소소한 아이스크림 가게, 병원도 많았고 예쁜 옷가게도 많았다.


다들 한 동네에서 꽁냥꽁냥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 냄새나고 정겨운 동네를 이제야 느끼다니...




지루해질 필요가 있다



내 삶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주변을 돌아보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만삭인 몸이라 멀리 갈 수 없고, 일을 할 수 없다 보니 내 일상은 단순해지고 하루에 1~2가지만 천천히 하며 살게 된다. 미니멀리즘, 심플 라이프의 삶이 이렇게 여유로운 것인가?


이런 지루한 일상을 지내다 보니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게 된다. 우리 집 세탁기에 건조, 삶음 기능이 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여태는 표준 세탁만 실컷 해왔는데… 우리 동네에 내가 좋아하는 공간들이 이렇게 많은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눈 내리는 모습을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 생각 없이 본 적이 있을까.

이렇게 예쁜지 장면인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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