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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25.02)

봄의 초입에서

by 영영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옵니다. 가만히 있어도 차가운 바람은 날카로이 파고들 텐데 그 바람들을 헤치며 우직하게 뛰어갑니다. 뛰는 동안 너무 두꺼운 옷은 방해됩니다. 그래서 좀 얇은 옷들을 겹겹이 입었습니다. 역시 땀이 나기 시작하자 제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멈추는 순간 땀이 빠르게 식을 것이고 그렇다면 더 큰 추위가 엄습해 올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멈추지 못합니다. 일부러 반환점을 자꾸만 연장합니다. ‘저기’서 되돌아가야지 하고 ‘저기’를 가면 기왕 이렇게 나왔고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 또 다른 ‘저기’까지 더 가보자고 스스로 격려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서 ‘저기’까지 달리며 쌓이는 거리와 시간이 제법 뿌듯함을 선물합니다. 그렇게 결국 5km가 되는 지점까지 갑니다. 사실 조금 더 욕심을 내려면 낼 수 있지만 아직은 이곳까지 뛰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게 반환점을 돌고 스스로 격려하며 왔던 길을 다시 격려하며 돌아갑니다. 한 번 경험한 길이기에 돌아가는 길은 마음이 가볍습니다. 조금은 아쉬웠던 전반부의 기록을 만회할 기회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몸이 다 풀리지 않아 초반 기록이 저조했다면 반환점을 돌고 난 뒤 부지런히 발을 움직인다면 얼마든지 기록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조금 힘들지언정 올라가는 비거리를 보며, 조금씩 나아지는 기록을 보며, ‘저기’까지 가며 봤던 ‘여기’의 풍경을 다른 방향에서 다시 바라봄에 뿌듯합니다. 거리도 거리이거니와 추운 날씨가 달리기를 더 힘들게 합니다. 언제쯤 달릴 때 반바지만 입고 뛰어도 될 만큼 날씨가 풀릴지 기다려집니다.

달리는 동안 생각의 서랍장을 정리합니다. 하루를 보내며 정말 많은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업무와 관련된 생각,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걱정,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 등 너무 많은 생각들이 서랍장 안에 뒤엉켜 있습니다. 필요 여부에 따라 남길 것들은 남기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물론 지금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고 하여 이 생각들이 다시는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주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 그 대상인데 그들은 제가 찾지 않아도 찾아올 것을 알기에 지금 너무 심각하게 다루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 서랍의 정리야말로 저녁 시간에 하는 러닝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며 지나간 많은 생각들을 옆에 보이는 강변에 던지며 달립니다.

문득 낮 시간 동안 뿌렸던 생각을 거둬들이는 저녁시간이 마치 가을의 수확과도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면 잠에 들어 내일을 또 준비해야 합니다. 한 해의 농사를 끝내고 휴식기에 들어간 겨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 년간 열심히 곡식을 수확했으니 겨우내 잘 쉬어야만 또 힘을 내어 이듬해 새로이 자랄 곡식들에게 영양분을 아낌없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도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자는 것이겠지요. 저 또한 다음 날의 제게 에너지를 아낌없이 주어야 하기에, 다음 날 살아남기 위해 단잠을 청합니다. 고단했던 하루를 마치고 든 잠은 깊게 자는 날도 있고 깊게 자기 힘든 날도 있습니다.

생각의 서랍을 다 정리한 줄 알았는데 미처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이 꿈속의 불청객으로 찾아오는 날. 그런 밤을 보낸, 그런 겨울을 보낸 다음 날은 아침부터 힘겹습니다. 비록 농사를 지어본 적은 없으나 농한기를 잘 보내지 못한 이듬해 농사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쉬이 유추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다음날 하루를 준비하는 오전이자 한낮의 왕성한 활동을 준비하는 봄부터 삐걱거립니다. 커피를 한잔 내려 마시고 스트레칭을 해보지만 역부족입니다. 다행히 만회할 기회는 남아있습니다. 점심시간이 그 기회입니다. 하루의 여름이자 가장 활발한 시간대인 오후를 잘 보내기 위해 점심 식사를 한 뒤 잘 쉬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잘 쉬어준다면 힘겨웠던 봄과는 달리 조금 더 회복한 상태로 여름을 잘 보내어 하루 농사의 흉작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을로 접어들며 다짐합니다. 오늘의 겨울은 반드시 잘 보내어 내일은 봄부터 알차게 보내겠다고. 그렇게 하루를 지내며 저만의 사계절을 보냅니다.

반환점을 찍고 난 후의 러닝. 중반부와 후반부에 열심히 달린다면 초반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습니다. 하루를 보내는 동안에도 아침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지언정 분명 더 멋진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을 느끼며 희망을 가져봅니다.


정말 두피까지 꽝꽝 얼 것 같은 추위도 조금씩 풀리고 있습니다. 퇴근 시간에도 아직 해가 다 저물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태양의 일과도 조금 길어졌고 출근시간에도 어렴풋이 떠오르려고 하는 저 태양이 반갑습니다. 그렇게 겨울을 또 보내줘야 할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끝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이 조금씩 끝나 가나 봅니다. 매년 반복되는 사계절이지만 유독 긴 여름과 겨울의 한가운데서는 그 계절의 유한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강한 추위는 온몸을 웅크리게 하고 강렬한 태양과 찌는듯한 더위는 녹아내리게 만듭니다. 겨울을 지나며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을 지나며 또다시 찾아올 겨울을 기다립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봄 날씨에는 어디 나들이라도 갑니다. 자꾸만 짧아지는 봄을 그냥 보내기 아쉬운 마음에 산책도 자주 나가고 화사로이 피어난 꽃들에 카메라도 들이밀어 봅니다. 그렇게 봄을 보내며 여름을 준비합니다. 아무리 여름이 더워도 그 더위에 마냥 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더위도 때로는 즐깁니다. 그렇게 즐기며 모았던 여름의 에너지와 기운을 추운 겨울 동안 가끔씩 꺼내어 그리워하고 버텨내고는 합니다.

농사를 짓는 분들은 봄이 되면 수확까지 한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순간이 없고 바쁘지 않은 때가 없다고 합니다. 봄철이면 모내기를 하며 대장정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뜨거운 여름에는 김매기를 하며 혹시나 땅이 선물하는 영양분을 엄한 풀들이 빼앗아 가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한다고 합니다. 김매기라는 것이 하루 이틀이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 풀만 조금 뽑아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품앗이라는 것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의 일을 도와주며 혼자보다는 둘, 둘보다는 셋이 함께 하며 다 같이 힘내서 여름을 난다고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수확하기까지 무수히 많은 과정을 묵묵히 견뎌 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추수를 하고 겨울을 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열하기도 힘든 과정을 매년 해내는 그들에게 봄부터 가을까지의 모든 순간은 어떤 의미일지 짐작해 봅니다.

오로지 ‘추수’ 하나만 바라보고 가기에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봄에는 그 목표가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 목표가 반드시 올 미래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언정 너무 먼 미래입니다. 농사에 문외한이기에 조심스레 추측합니다. 모내기가 마무리된 논을 바라보는 것이 목표이자 행복이 아닐지. 하루의 봄인 오전 동안 열심히 땀 흘리며 오후인 여름을 준비하며 한 입 베어 무는 새참이 행복의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고된 하루를 마무리하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는 시간이 한편으로는 하루를 수확하는 시간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찰나의 순간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을, 기쁨을, 감사를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행복해하고, 기뻐하고 또 감사하며 그렇게 언젠가 다가올, 반드시 다가올 미래를, 목표를, 수확을 기다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순간의 행복이 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고난을 버티게 해주는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조깅을 떠올립니다. ‘여기’서 ‘저기’로 가며 올라가는 비거리, 쌓여가는 시간이 쉽지 않은 시간을 버티게끔 도와줍니다. 반환점을 돌아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갑니다. ‘저기’까지 가며 바라봤던 ‘여기’의 풍경이 뿌듯하게 합니다. 그리고 머릿속의 상념들을 정리하며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행복을 선물합니다. 중간중간의 실수나 아쉬움들을 개선하며 그렇게 하루의 목표 거리를 채워갑니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다시 되짚어 봅니다. 비록 힘겨웠던 오전의 시간일지라도 든든한 점심과 편안한 휴식의 달콤함을 만끽합니다. 여전히 어렵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 업무들을 조금씩 천천히 해내며 뿌듯함을 느낍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퇴근하며 오늘 하루 밥값을 다 했는지 자문합니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제보다 아주 조금은 성장하지 않았을까 자답하며 업무의 시공간을 벗어납니다.

한 해를 되짚어 봅니다. 만연한 봄기운을 그저 보내지 않고 집 앞 산책이라도 하며 봄 내음을 맡아봅니다. 한여름의 무더위지만 마냥 뒤로 물러나지 않고 여름을 있는 그대로 느껴 봅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에는 길가의 낙엽을 보며, 울긋불긋 물든 단풍을 보며 가을의 정취를 손아귀에 넣어봅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추위에 떨며 기다린 붕어빵을 베어 물며 추위를 이겨 냅니다. 이렇게 순간의 행복을 꼬-옥 붙잡아 봅니다.

조깅을 하며 힘들었던 순간들을 잘 이겨왔기에 오늘의 조깅을 잘 마무리하고 내일의 운동을 준비합니다.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다음날을 준비합니다. 한 번의 사계절을 보내주고 새로운 사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합니다.


나는 어디쯤 있는지 생각합니다. 어느 계절에서 어떤 정취를 느끼고 있는 것인지 생각합니다. 삶의 목표를 얼마나 이루었는지 돌아봅니다.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았습니다. 어쩌면 이제 정말 한 발자국 정도 내민 것 같습니다. 이 한 걸음을 위해 지금까지 고군분투했습니다. 봄쯤이 아닐까 합니다. 첫걸음의 방향이, 걸음 폭이, 그 포즈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봄의 초입입니다. 하루의 시작이 조금 아쉬워도 괜찮습니다. 점심시간을 잘 활용하여 여름을 잘 보낼 기회가 있었으니까요. 몸이 다 풀리지 않아 초반의 기록이 아쉬워도 괜찮습니다. 그 아쉬운 기록을 보완할 수 있는 러닝의 중후반부가 있으니까요.

삶의 목표는 아직 저 멀리 있습니다. 멀리 있는 목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가슴속에 아로새겨 둡니다. 하지만 아직은 멀리 있기에 조금 가까이 있는 목표도 생각합니다. 그 순간에 느낄 수 있는 행복을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순간에 가질 수 있는 감사의 마음을 온전히 가지려 합니다. 뿌듯해도 되는 순간에는 잠시 뿌듯한 마음도 가지려 합니다. 그렇게 순간의 행복과 감사와 뿌듯함이 그 순간을 버티고 이겨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추수의 계절이 온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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