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로
팀파니가 두두두둥 울립니다. 그러더니 피아노가 강렬하게 내려치는 음으로 시작합니다. 띵~! 띠디딩~띠디딩~~
북유럽 특유의 장엄함뿐만 아니라 서정적인 멜로디가 어우러져 웅장하면서도 감성적인 느낌을 주는 명곡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영화, 드라마 CF 등 다양한 곳에서 사용됩니다. 그래서 아마 저 아래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 재생하신다면 “아~ 이 음악이구나~”하실 겁니다. 팀파니가 곡의 시작을 알리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개될 거라 생각하지 못한 음악입니다. 그래서인지 흐릿한 기억 속 이 음악은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나 반전을 알릴 때 사용된 것 같습니다.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1악장입니다.
정말 바쁜 오후였습니다. 옆 팀, 옆 단지, 대외기관 등 다양한 곳에서 업무 협조 요청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화급한 업무에 대한 짧은 회의도 있었습니다. 정규 일과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내일은 본사에 일이 있어 서울까지 가야 합니다. 빨리 출발하고 싶지만 팀장님께 보고드릴 사안과 의논할 내용이 있습니다. 얼른 출발하여 서울에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하고 싶다는 바람은 보기 좋게 실패입니다. 되려 퇴근 시간보다 더 늦게 출발합니다. 그렇게 정말이지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서울로 향합니다. 얼른 가서 저녁을 함께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 팀장님의 말씀이 귀에 맴돕니다. “너 어디 딴 데 간다더라? 인수인계 잘해둬.” 아! 내가 또 어디론가 가는구나 싶습니다. 사실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올 때 마냥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언제 다시 서울로 갈 수 있을지 걱정하였고 더는 내려가지 않았으면 하는 노파심도 있었습니다. 복잡한 머릿속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저 정통법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냥 묵묵히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하며 나의 큰 꿈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재상경을 꿈꾸며 지낸 지 7개월이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무렵 저는 다시 어디론가 가나 봅니다. 서울로 가는 길에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팀장님의 말씀은 마치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팀파니 소리는 잘 안 들렸습니다. 제게 들린 것은 갑작스러운 피아노 소리뿐입니다. 마음의 짐을 한가득 싣고 가서인지 서울로 가는 길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한참을 달린 것 같지만 아직 목적지까지는 한 시간이나 남았습니다. 살짝 늦게 출발하였기에 교통체증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체증 때문인지 시원시원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머리가 복잡하든 어떻든 출근 시간입니다. 나의 미래 근무지가 어디로 될지 모르지만 오늘의 근무지는 명확합니다. 본사로 가 회의를 한참 진행하고 나서야 여유가 생깁니다. 한숨 돌리며 어제 오후 정신없을 때 온 메일들을 하나씩 확인합니다. 정말 잠시 확인을 못한 것인데 벌써 스무 개 정도의 메일이 쌓였습니다. 확실히 어제 오후 정신이 없긴 없었나 봅니다. 그중 이목을 끄는 제목이 있습니다. 제 인사와 관련된 메일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아! 본사로 발령이 났습니다. 이제 지방 생활을 정리해도 됩니다. 매주 왕복 380km를 오가지 않아도 됩니다. 월요일 새벽 네 시 무거운 눈꺼풀을 초인적인 힘으로 밀어 올리고 두 시간을 운전하지 않아도 됩니다. 냄비 하나 챙기지 않았기에 배고파도 어쩔 도리가 없던 숙소에 더 이상 있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근처 마트에 장을 보러 가듯 가던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는 빵집이 이제는 멀어집니다. 저의 빵 배달로 행복하셨던 분들이 많습니다. 행복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저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빵 배달이 선사하는 행복은 보여드리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근무지가 제법 마음에 듭니다. 그렇기에 저는 만족하고 꽤 행복합니다. 비록 빵 배달로 행복을 선물해 드리기는 어려워졌지만 저라는 사람이 드디어 회사에 제법 만족하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시며 안도감뿐 아니라 다른 행복을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감정들을 정말로 선물하기 위해 저는 또 부단히 노력할 예정입니다.
대전으로 가라는 연락도, 본사로 오라는 연락도 갑작스러웠습니다. 그런 낌새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말 뜬금없는 타이밍에 인사 명령이 났었습니다. 한 번은 청천벽력 같았고 한 번은 다행스러웠습니다. 다행스럽다고 하여 갑작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기에 사실 이 또한 제법 놀라운 소식이긴 했습니다. 팀파니 소리와 같은 전조증상이 살짝 있었지만 변화의 폭이 제법 커서인지 최종 통보는 웅장한 피아노 소리와 비슷했습니다. 개인 휴가 직후 인사이동 예정입니다. 이에 대전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일주일 동안 바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대전에서는 늘 별다른 약속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번 한 주는 특히 선약이 없어서 다행인 수준입니다. 송별회를 명목으로 달력에 하루하루 약속이 표시됩니다. 저녁 시간이 다 차자 점심시간도 한두 개 생겨납니다. 꽤 바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인수인계하면서도 제가 해야 하는 업무들을 해결하고 그러면서도 약속도 가야 합니다. 바쁜 일주일을 보냈음에도 끝내 한 번도 식사를 못 한 분들도 많습니다. 다들 아쉬워합니다. 그리고 그간 고생 많았다고 본사는 일이 더 힘들 텐데 잘 적응하라며 무운을 빌어줍니다.
정확히 8개월입니다. 서울이 이제는 더 이상 타지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아주 새로운 타지로 발령받아 8개월을 지냈습니다. 적응을 넘어 안주한다면 안분지족이 되어버릴까 봐 일부러 불편함을 감수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냄비 하나 챙기지 않았으며 8개월 동안 딱히 가본 곳도 많이 없습니다.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가지 않았습니다. 안주하기 싫었으니까요. 그리고 업무적으로 비약적인 성장은 어려워도 조금, 아주 조금만이라도 더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업무를 조금 미루긴 하였지만 언젠가처럼 아예 모르는 체하진 않았습니다.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 한 번 더 챙겨보았습니다. 그렇게 미진하지만 유의미한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들 수고했다고 격려의 한마디를 해주시나 봅니다. 그리고 저 또한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 노력했기에 수고의 메시지가 괜히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생각하는 듯합니다. 대전을 내려오며 한 결심을 조금은 시켜낼 수 있었던 것 같아 참 다행입니다.
대전 생활을 마무리하고 올라가는 날입니다. 마무리 정리까지 다 하고 나니 7시가 다 되었습니다. 비도 옵니다. 그래서인지 차도 많이 막힙니다. 비록 금요일 저녁이라 하여도 세 시간이면 닿을 거리가 오늘은 더 오래 걸립니다. 마지막 상경길이라고 저를 더 붙잡나 봅니다. 속이 마냥 시원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시원합니다. 정말 잘 됐다 싶습니다. 아직 새로운 부서가 어떨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제야 진정한 회사 생활이 시작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갖게 됩니다. 지난 2년을 되돌아봅니다. 시간이 참 부지런하게 흘렀습니다. 그리고 현장마다 저는 다른 분위기로 또 다른 자세로 일하였습니다. 어쩌면 서울 현장에서는 직장생활 내에서 방황하기 바빴습니다. 삶이란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제 계획과 너무 다른 현실에 적잖이 당황하여 무한히 헤매었습니다. 그래서 목표를 제대로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미래를 그리지 못하자 현재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버티기 급급했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제 모습들이 타지에서의 근무로 귀결됐을 것입니다. 경각심을 가지라는 알람이었으며 재충전하고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은 것입니다. 다행히 그 알람과 기회를 잘 살렸습니다. 대전으로 가는 날부터 저의 목표는 재 상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 새벽 대전을 내려가는 차에서 그 목표를 다시 마음에 새겼습니다.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안주하지 않고 노력하여 다시 서울로 가겠다는 그림을 그렸더니 결과적으로 다시 서울로 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이런 결과들은 내가 어떤 모습을 그리며 어떻게 나아왔는지에 대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그리그의 음악처럼 갑작스러운 결과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한 남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습니다. 사실 음악은 건반을 누를 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미 음악은 저 멀리서부터 시작되어 오고 있다고 합니다. 두 종류의 연주를 통해 차이점을 직접 보여줍니다. 음악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가 설명하는 내용이 이해됩니다. 직접 건반을 치며 보여주니 아주 깔끔합니다. 음악은 어디에선가 이미 시작되었고 그 음악이 내게로 온 것 같습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초보’라는 단어조차 붙이기 민망한 제가 알아들을 정도로 이해시켜 주는 것을 보니 정말 대단한 피아니스트가 맞습니다. 정말이지 그 어디선가 음악은 시작되었고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것은 그저 저 멀리서 오던 그 음악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들려주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쇼팽의 발라드 4번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저의 이동은 그리그의 음악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피아노 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피아니스트가 들려주는 쇼팽의 발라드 연주처럼 이미 어디선가 시작된 음악이 그저 제게로 와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모습이 되고 싶었는지 그리던 그 시간이 결과를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모습을 열심히 꿈꾸었기에 저 멀리서 서서히 다가온 것입니다.
그리그의 음악을 다시 들어봅니다. 어쩐지 팀파니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옵니다. 팀파니 소리가 저 멀리서 음악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나의 이동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확실히 들려오는 팀파니 소리처럼, 저 멀리서 시작되어 다가오는 쇼팽의 발라드 4번처럼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https://youtu.be/I1Yoyz6_Los?si=gIi8q79GK5lP6-iB
https://youtube.com/shorts/UATqsxjI8o4?si=F6Zn7ocqxfXH9z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