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을 항해하며
아, 이상합니다. 기름진 음식을 먹은 뒤 속이 편치 않은 날들이 꽤 있었기에 그렇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배가 아파도 너무 아픕니다. 배가 조금 아프더라도 금방 괜찮아졌던 과거를 믿고 오늘 또 날 것을 먹은 값을 치르는 것인가 생각합니다. 매년 감기로 고생하였는데 어쩐지 올해는 감기를 앓지 않더니 언젠가 과학책에서 읽었던 질량보존의 법칙처럼 1년에 아픈 날은 일정한가 봅니다. 다행히 본가에 간 시기에 아픈 터라 타지서 혼자 아프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는 괜찮아질 거라 생각하면 벌써 나를 보내냐고 따지듯 배가 콕콕 아파 옵니다. 무엇이든 잘 먹고 거뜬히 소화하던 과거의 영광은 희미해지고 언젠가부터 과하게 기름진 음식을 먹은 다음날이면 신호를 보내는 장에게 미안한 마음도 생깁니다. 30년을 너무 열심히 일하게 한 건가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아직 지나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걱정도 생깁니다. 찜질패드로 달래어도 보고, 약을 먹기도 하며 얼른 쾌차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렇게 낫기 위해 신경 쓰는 이유는 아픔 그 자체가 반갑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내일은 다시 서울로 가야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새벽부터 기차를 타고 올라가 오전부터 세미나를 듣는 일정이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참 부지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정말 부지런한가에 대한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부지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냥 쉬고 천천히 출발해도 되었겠지만 마냥 포기하기에는 비용도 지불하였고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제가 참석하겠다고 한 세미나이기에 꼭 참석하고 싶었습니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도 참석하고 싶었던 세미나는 다름 아닌 부동산 관련 세미나입니다. 그동안 많은 관문을 지나왔고 이제는 또 새로운 관문으로 나아가보려 신청했습니다. 청약통장을 만들면 내 집을 주는 줄 알았던 고등학생은 녹록지 않은 현실에 당황하였고 이제는 어떻게든 ‘내 집마련’이라는 미션에 좀 더 열심히 참여하고자 신청하였습니다. “여기 좋습니다. 여기 사세요. 제가 보장하는 곳입니다”와 같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는 자리는 아닙니다. “현재까지의 흐름과 과거 데이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추론을 해본 결과 이곳과 이곳이 괜찮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점은 유의하며 이런 곳은 조심하세요”와 같이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 답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과 오답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시간입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들을 구체화하고 몰랐던 것들에 대한 조각을 얻으며 시장에 좀 더 열심히 참가하려는 의지입니다.
다행히 떠나기 전 컨디션을 회복했습니다. 아직 100%의 컨디션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세미나도 잘 다녀왔습니다.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내용들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마음의 짐은 조금 더 무거워졌습니다. ‘고단했던 삶이 끝나고 이제는 장밋빛 인생의 시작’이라는 불가능에 대해 기대하지 않은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삶’에 대해 제가 가진 많은 고찰 중 하나는 “‘삶’이란 쉽지 않은 미션들이 꾸준히 엄습해 오는 것이며 그 미션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잔잔하고 안정적인 삶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에 대체로 불안정하고 어수선하지만 그 가운데 잠시 찾아오는 평화와 행복의 순간들을 감사하며 살아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세미나는 망망대해가 생각보다 더욱 험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을 보다 단단하게 먹어야 한다고도 알려주었습니다.
일주일을 부동산 정보 사이트에서 헤매었습니다. 장기적인 시야로 차근차근 나아가야 한다는 추측이 맞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다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였습니다. 정보만 자꾸 모은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나의 상황 그리고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빌려 온다면 얼마나 빌릴 수 있을지 알아야 알아본 정보들의 효용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은행도 두세 번을 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저의 부족함을 도와줄 거라 믿었던 은행의 자금력이 정책에 의해 필요한 만큼 지원이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일주일간 활화산 같던 제 열정에 빙하를 끼얹었습니다. 사실 아쉬울 틈이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쉬움으로 치부할 수 없는 크기의 금액입니다. 약간의 부족함이면 고민하며 어떻게든 해보려고 할 텐데 약간의 부족함이 아니었습니다. 울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저 멀리 가겠다는 것도 아닌데 어찌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지...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원망하여도 의미가 없습니다. 좌절하고 있을 수 없으니 다음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당장 내 공간을 마련하기 힘들다면 언젠가 마련할 때를 기다리며 나름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계획을 변경합니다. 계획이 변경된 이후에는 그 계획에 맞게 새로운 정보를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수험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10개월 남짓이었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특히 제 자신에 대해 더 객관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험생활을 마무리하겠다고 결심하고 돌아서니 망망대해에 다시 던져졌습니다. 망망대해를 함께 할 직장인으로서 탈 ‘배’를 알아보는 것도 그것을 구하는 것도 제 임무였기에 또 하나씩 하나씩 준비하고 다져왔습니다. 그렇게 어떤 배에 올라탔고 지금까지 열심히 노를 저어 왔습니다. 배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고민도 하였고 이 배가 괜찮은 배인지 의심하고 얼른 다른 배로 갈아타야 하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괜찮은 배가 당장 보이지 않더라도 한번 구해본 경험을 믿고 하선(下船)을 하려던 찰나 배에서 다른 보직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보직이 좀 더 어렵고 힘겨워도 이 배에서 중요한 역할이라는 약간의 자부심과 배의 항로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는 뿌듯함도 느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30년 동안 망망대해를 건너며 손에는 아픔을 무디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굳은살도 생겼고 높은 파도에도 노와 키를 놓지 않을 근력도 길러주었습니다. 높은 파도에 뱃멀미를 하지 않도록 체력도 든든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이 막막함을 다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바다를 건너오며 여러 종류의 배를 탔고 항해하며 생긴 굳은살, 근력, 체력으로 또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어느새 연말입니다. 2024년을 보낸 것이 얼마 전 같은데 이렇게 또 새해가 성큼 다가옵니다. 편지를 띄우고 몇 번이고 다시 읽고 나면 저의 한 두 달간의 ‘삶’이 묻어있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행복할 때는 편지가 마냥 행복하여서 다행이지만 고민과 걱정이 많거나 긴장 속에서 시간을 보낸 달에는 여지없이 편지에서 그 흔적이 묻어 나옵니다. 2026년에 보내드리는 편지에는 조금 더 여유와 낭만과 사랑이 있길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