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가 지나자 갈라진 틈이 눈에 띌 정도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부실 공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집 부실 공사야.”
아직 어려 철이 없던 나는 학교가 끝나고 친구와 언덕길을 내려올 때면 빌라의 갈라진 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집이 무너지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어른들의 우려도 서서히 불안으로 바뀌어 입주민 4가구는 몇 번의 회의 끝에 보수공사를 하기로 했다.
오랜 시간 걱정한 것에 비해 공사는 며칠 만에 끝이 났다. 갈라진 외벽에 시멘트를 채우고 페인트로 건물을 새로 칠하고 나니 부실 공사라는 오명과 세월의 흔적은 사라졌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공사비는 어른들의 또 다른 근심이었으나 나는 깨끗해진 외형에 새집이 된 것 같아 마냥 좋았다.
근심 없이 또 몇 해를 보내었으나 속은 여전히 부실 공사여서 건물이 조금씩 기울어지는 것 같다는 어른들의 한 마디가 곧 나의 걱정이 되어 가끔은 자는 동안 집이 무너져 내릴까 봐 무서웠지만 대부분은 의식하지 못하고 그런대로 안심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스물세 살이 될 때까지 무려 18년 동안 그 집에서 살았다.
방마다 외벽으로 난 그 집은 다섯 식구가 살기에는 다소 좁고 추웠다. 큰 방 하나와 작은 방 하나, 거실에 미닫이 문이 달린 방 하나와 화장실이 있었다. 엄마의 미싱이 있어 오랫동안 미싱 방으로 불렀던 미닫이문의 작은 방은 특히 외풍이 심해서 한여름에도 서늘했다.
앞 건물에 가려져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작은 방을 세 자매가 함께 썼다. 한겨울이면 서로 가장 따뜻한 가운데에서 자기 위해 자리싸움을 하기도 했고, 외벽으로 난 화장실도 너무 추워서 가끔은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을 참기도 했다.
내 방, 내 책상, 내 침대를 꿈꿀 수 없어서 속상하고 답답했다. 이사 가는 게 소원일 정도로 지긋지긋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이사보다는 독립이 더 빠르겠다고 생각하던 때, 엄마는 갑작스럽게 이사를 결정했고 같은 동네에 오래된 작은 빌라로 이사를 했다. 이전 집과 크게 다른 것이 없었지만 이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레었다. 이사를 나오던 날 홀가분하면서도 텅 빈 집을 돌아보니 온갖 물건들로 꽉 차 있던 이 집이 이렇게도 작았나 싶어 처음으로 우리 집이 낯설었다.
이사한 후로 몇 번 우편물을 확인하러 그 집 앞으로 갔을 때, 더는 우리 집이 아니라는 거리감이 느껴지면서도 언제라도 뛰어 들어가면 내가 살던 그 집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스물다섯에 처음 서울로 독립한 후로 수도 없이 이사를 했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화장실이 있는 3평짜리 지하 원룸부터 밤마다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날고 기던 월 25만 원짜리 옥탑방, 언 수도를 녹이느라 혼자 고생했던 집, 낡은 보일러를 교체해주지 않아 전원이 자주 꺼져서 찬물로 샤워해야 했던 집 등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 집들을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1~2년에 한 번씩 옮기면서 집주인의 횡포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외롭고 가혹한 서울살이에 지쳐서 어디가 내 집인지, 나는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내 집이 있긴 한 건지 서러울 때면 딱히 좋은 것도 없었으면서 새삼 그 춥고 작은 빌라가 그리웠다.
어느덧 이사한 지 십 년이 훨씬 넘고, 내가 독립을 한 후로 부모님이 한 번 더 이사를 하면서 더 이상 그 집을 지나칠 일도 없어졌지만 가끔 꿈에서 그 집이 나온다.
부실 공사의 아픔을 여전히 품고서 지난날의 불안함을 비웃듯 삼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