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당신, 거기 있나요?

편지를 쓰던 우리는 어디로 갔을까

by 홑들

편지지 세트가 한가득 든 서랍이 있었다. 투명 포장 비닐 안에 든 고운 종이들. 편지지 수집에 꽤 열중했던 지난날. 문구점을 돌아다니며 편지지 꾸러미를 구경하는 건 그 시절 나의 사소하고도 즐거운 취미였다.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하면 사두었다가 친구에게, 그리운 사람에게, 혹은 그저 주고받는 행위가 즐거워서 낯 모르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다(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썼던 위문편지를 얼마나 공들여 썼는지 군인 ‘아저씨’에게 답장도 받고, 편지 왕래도 몇 번을 했었다). 뭐가 그리 전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매일 보는 친구에게도 자주 편지를 썼다. 그렇게 사용하고 수집용으로 하나씩 남겨둔 편지지와 편지봉투 세트가 서랍 하나를 꽉 채웠다.


pexels-leeloothefirst-4544716.jpg 이제는 쓰지 않는 편지를 떠올리며(이미지: pexels, Leeloo The First)


편지를 쓰고 답장을 받기까지의 시간. 우체통을 통하지 않는 직접 전달이라면 사나흘, 우표를 붙인 정식 편지라면 릴레이로 주고받아도 답이 돌아오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렸다. 그 기다림의 시간마저도 편지의 일부였다.

그 영화 봤어? 그게 그렇게 재밌다던데. ○○이는 너한테 왜 그런다니? 나중에 ○○에 가보고 싶어. 고민하던 그건 어떻게 됐어? 내가 했던 말, 생각해봤어? 네가 어떤 표정으로 편지를 읽을지 궁금해. 시답지 않은 농담, 쓸데없는 말 사이사이로 상대방에 대한 마음이 전해진다. 오래 고민해서 볼펜 똥이 뭉친 자리, 며칠을 묵혔다가 이어서 쓴 티가 나는 문장, 휙휙 생각나는 대로 내달린 단락, 내용만이 아니라 편지지 위의 글자 자체에서 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느린 편지가 참 좋았다.


편지를 소재로 한 책을 좋아하는 것도 아마 이런 취향에서 비롯됐을 거다. 잘못 보낸 이메일 한 통이 그저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점점 스며들어 사랑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서간 소설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나 가난한 작가와 중고서적상이 편지로 우정을 쌓아가는 에세이 『채링크로스 84번지』는 ‘나의 애서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 잘 어울리지 않는 이런 ‘낭만적인’ 사람이 나만은 아니라서 이 두 권은 꽤 꾸준히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런 식의 소통을 바라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느려도 조금씩 깊어지는 우정이나 사랑, 소란스럽고 현란한 말이 아니라 천천히 번져가는 단정한 말, 무작위 대중이 아니라 나에게만 전해지는 이야기를 읽으며 느끼는 설렘이나 흐뭇함, 혹은 스트레이트로 꽂히는 메시지가 아니라 돌고 돌아도 결국 내게 도달할 말, 금세 사라지는 헛된 말을 활자로 붙들어두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은 바람.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그런 게 모두들 못내 아쉬운 것 아닐까.


pexels-koolshooters-6980542.jpg 마지막으로 언제 손편지를 썼더라.....(이미지: pexels, KoolShooters)


물론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는 아날로그 편지가 아니라 이메일을 주고받는 이야기다. 그래도 이메일을 거의 업무적으로만 쓰는 요즘에 비하면 소설속 이메일은 아날로그의 향취가 충만하다. 단답형의 대화, 의미 없는 이모티콘, 습관성 ㅋㅋㅋ와 ㅎㅎㅎ가 난무하는 인스턴트 메시지의 세계에 에미와 레오가 나눈 대화는 자리할 곳이 없을 테다.


에미와 레오가 주고받은 대화에는 상대방을 자신 안의 또 다른 목소리로 받아들이는 고백이 담겨 있다. 독백을 대화로 바꿔주는 존재, 내면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존재. 요즘의 빠른 대화에서는 좀처럼 건네기 어려운 그 다정하고 속 깊은 말이, 책 속에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런 말을 나눌 사람과 매체를 하루하루 잃어가고 있는 기분이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관계를 더 얕고 성급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렵다.


많은 것이 그렇듯 그 시절의 편지지 세트도 어느샌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그렇게나 좋아했던 편지를 나도 이제는 쓰지 않는다. 업무상 주고받는 이메일, 친구들과 가끔 나누는 카톡과 문자, 정보 교환을 위한 단톡방 그리고 무수한 마케팅 메시지……. 빠르게 도착하지만 전혀 남지 않고 사라질 많고 많은 말. 실시간이라서 오히려 온전히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말, 몰라도 될 것을 알게 되는 속쓰림(‘읽씹’ 같은 거 모르던 그 시절이 좋지 않았나). 초연결 시대라는데 무엇을 연결하는지 모르게 마음이 자꾸만 헛헛해진다. 언제든 어디에 있는 사람이든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지만 어쩐지 우리 사이는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다. 연결의 그물망 속에서 오히려 고독의 섬이 되어간다.


20250823_181938.jpg 이제는 정말로 추억 속으로 사라진 ICQ(이미지: 화면 캡처 https://icq.com/desktop/en?#windows)


ICQ라는 최초의 인터넷 인스턴트 메신저가 있었다. 신기하고 편리해서 한동안 즐거워하며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I seek you”를 변형해서 만든 이 장난스러운 이름의 메신저가 꽤 마음에 들었었다. 이후 비슷한 메신저가 등장하면서 그걸로 바꾸었고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작년 공식적으로 서비스를 종료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오래 찾지 않았던 친구를 잃은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그러나저러나 이제 나는 메신저는 쓰지 않는다(회사 다닐 때 쓰던 사내 메신저가 마지막이다). 늘 닿아 있고 싶거나, 늘 닿아 있을 필요가 없어진 나의 상황 때문인지, 세태의 자연스러운 변화인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가끔은 “너 거기 있니”라고 묻고 싶은 날이 있다. 이상한 일이다. 언제든 누구에게든 연락할 수 있는 시대에 오히려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줄어든다. 찾는 행위 자체를 멈춤으로써 더욱 헤매게 되는 역설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외로움은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가 결여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소통 수단이 이렇게 발달했는데도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뭘까. 빠르고 편리한 소통이 오히려 깊고 의미 있는 관계 맺기를 어렵게 만드는 건 아닐까. 방향은 고민하지 않고 앞으로만 밀어붙이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우리를 더 멀리 흩뜨려놓은 건 아닐까. 오래 머무르고 싶은 좋은 대화가 너무 부족하다.



우리는 어차피 완전한 이해에 이를 수 없다. 그렇다 한들, 오해한다 한들, 그 과정에서 상대를 떠올리고, 기다리고, 주저하며 꺼내는 말이 관계를 살찌운다. 말이라는 것은 어쩌면 도착지보다 과정 자체가 중요한 여정일지 모른다.

하루하루 완벽해지는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묘한 허전함이 든다. 흠잡기 힘든 답을 내놓지만 그건 계산의 산물일 뿐, 상대를 떠올리며 건네는 말이 아니다. 마음은 쓰지 않고, 단지 연산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거기에 매달리게 되겠지. 그래서일까, 앞으로 ‘답’은 더 많아지겠지만 정작 마음을 나눌 상대는 더 줄어들 것만 같다.

이 현상을 단순히 좋다 나쁘다로 재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것, 관계의 실패, 사회적인 소통 시스템의 결핍이 불러온 결과일지도 모른다. 기술은 언제나 인간의 갈망을 반영해왔으니까.


pexels-cokfotokandulu-7628689.jpg 너와 나의 말은 어디로 가고 있나(이미지: pexels, Ondosan Sinag)

그래도 나는 기억한다. 느린 편지가 건네던 온기를, 기다림이 만들어내던 깊이를, 상대를 향해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문장을. 결국 우리가 찾는 것은 대체 불가능한 ‘너’이고, “거기 있니”라는 물음에 대한 “나 여기 있어”라는 응답일 것이다.


똑똑. 당신, 거기 있나요?

내 마음속 서랍 한 칸에는 여전히 그 시절 편지지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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