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이상한 몸을 껴안고

by 홑들

매트 위에서 몸을 뒤로 젖히는 순간, 깨달았다. 내 몸이 언제부터인가 자꾸만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을. 일주일에 두 번 요가 수업을 받는다. 좋다는 말은 몇십 년 전부터 들었지만, 요가에 발을 들인 건 올해가 처음이다. 과연 말처럼 요가를 하는 시간은 참으로 좋다. 매트 위에서 몸을 이리저리 늘이고 조이는 동안 잡념이 끼어들 틈이 조금씩 닫히고, 오직 몸과 나만 남는다. 그리고 할 때마다 인식하게 된다. 어딘가 이상한 나의 몸을.



pexels-mikhail-nilov-6740756.jpg 요가를 하며 조금씩 몸과 친해진다 (이미지: pexels, Mikhail Nilov)


사는 동안, 일하는 동안 목과 어깨, 팔목과 손, 허리 등 몸 곳곳에 자잘한 무리가 쌓인다. 거북목, 일자목, 어깨결림 같은 증세가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나를 따돌리고 내 몸과 한 편을 먹는다. 키보드를 누를 때마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손목터널증후군 같은 건 그러려니 싶은 고질병이 된 지 오래다. 이런 건 익히 아는 내 몸의 이상함이다. 내가 차근차근 쌓아온 내 삶의 역사 같은 통증이다.


알게 모르게 쌓인 통증 말고, 부주의로 순식간에 생겨났다가 치료 적기를 놓쳐서 떠나보내지 못한 통증도 있다.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연원의 순간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내 실수가 만든 통증이다. 발목을 접질리는 바람에 인대가 늘어나 퉁퉁 부었는데도 미련하게 마감 일정을 맞춘답시고 치료를 미뤘다가 들러붙은 통증 같은 것이 그렇다.


그런가 하면 요가 시작 전에는 전혀 몰랐던 몸 상태도 있다. 나름대로 스트레칭도 열심히 하고, 유연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는데, ‘어라? 이거 왜 이런가?’의 순간이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똑같은 동작을 해도 오른쪽은 무리가 없는데 왼쪽으로 움직이면 오금이 당긴다. 몸을 뒤로 젖히는 동작을 하면 여지없이 오른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바닥으로 내려서 앉는 자세는 어릴 때 그야말로 밥 먹듯이 편하게 하던(밥 먹을 때도 하던) 자세인데, 불편감에 오래 하고 있을 수가 없다.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에 생겨난 불균형과 변화다. 일주일에 두 번 그렇게 나는 내 몸의 이상함을 만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균형 잡힌 몸으로 되돌리기 위해 천천히 애를 쓴다.






몸과 세월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가끔 새 학기를 준비하며 새 교과서를 나눠 갖던 장면이 떠오른다. 교실의 왁자함, 그 시절의 에너지, 통증이나 상처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던 천진했던 시절. 책은 대체로 앞에서부터 하나씩 갖고 뒤로 넘기는 식으로 배분되는데, 아이들은 다들 작은 흠집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된다는 듯 깨끗한 교과서를 획득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책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휘리릭 넘겨보면서 ‘완벽한 새 책’을 갖기 위해 애썼다. 병아리 감별사의 눈도 그렇게 치밀하진 못했을 거다. 그래야 공부가 잘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야 한 학기가 편안하기라도 할 것처럼 아이들의 손놀림에는 어떤 기원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웬걸. 일주일만 지나도 책은 이내 여백에 낙서와 비뚤비뚤한 줄과 접힌 구석과 부주의하게 떨어뜨려 생긴 상처투성이가 된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가장자리부터 닳고, 여기저기 주름과 자잘한 흠집이 생긴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생겨난 상처는 받아들이기 싫지만, 나와 함께하는 동안 생겨난 것은 나의 역사가 되어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된다. 처음에는 아쉬웠던 흠결이, 어느새 내 손길이 담긴 일상의 기록이 된다. 고르고 고른 새 책은 한 학기 동안 사용하면서 새것과는 영판 다른 ‘나만의 교과서’, 하나밖에 없는 ‘내 책’이 된다.



pexels-suzyhazelwood-1290828.jpg 내 몸이 이제 세월 쌓인 책 같다 (이미지: pexels, Suzy Hazelwood)



지금 이 몸도 흠 없이, 통증 없이, ‘거의 완벽하게’ 나에게 왔다. 세월과 함께 작은 통증과 불균형이 하나둘 쌓였을 뿐. 이제 나는 그 흔적을 무심히 흘려보내기보다는, 내 삶의 한 페이지로 받아들이고 안아주고 때로는 수선하려 한다. 앞으로도 이 몸과 한참을 더 살아야 할 테니.


작년, 건강검진에서 헬리코박터균이 나왔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흔한 증상이고 한국인 치고 헬리코박터균 없는 사람도 드물지 않나 싶어서. 그런데 진단을 한 의사는 “젊으시니까 치료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응? 내가 젊은가? “젊다고요?”라고 되묻는 내게 의사는 대답했다. “그럼요, 앞으로 한참 더 이 위로 사셔야 하는데.”

그렇다. 내 오장육부와 근골격은 그동안도 애써주었지만 앞으로도 오래오래 달래고 관리해서 잘 써야 하는 나의 동반자인 것이었다.


이제 내 몸을 좋은 문장처럼 가다듬기로 한다. 교정교열이나 윤문을 할 때, 같은 일도 마음가짐에 따라 다른 어휘로 표현하게 된다. 빨리 끝내고 싶은 일, 어쩐지 냉정해져서 정성을 별로 들이고 싶지 않은 일은 ‘고친다, 쳐낸다, 수정한다, 처리한다, 손질한다’ 등으로 표현하지만 더 좋은 책으로 만들고 싶어 손을 보탤 때는 ‘만진다, 매만진다, 다듬는다, 어루만진다, 손본다’ 같은 어휘를 사용하게 된다. 이제는 내 몸을 그렇게 좋은 문장처럼 어루만져주기로 한다. 후자의 마음가짐으로 몸을 대하기로 한다.


“혼자 걷는 게 좋은 것은 걷는 기쁨을 내 다리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박완서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속 한 구절이다. 그리고 이런 말이 이어진다. “70년 동안 실어 나르고도 아직도 정정하게 내가 가고 싶은 데 데려다주고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땅과 나를 연결해주는 다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늘 내 가슴을 울렁이게 한다.”



pexels-olly-3763869.jpg 유능한 몸을 위해 매일 조금씩 (이미지: pexels, Andrea Piacquadio)



나도 내 다리에, 내 어깨에, 내 팔목에 감사하며 오래오래 걷고 움직이고 싶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내 몸을 아껴주고 달래주되, 다른 한편으로는 몸을 더 건강히 단련해서 일상에, 산책에, 일에 유능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다고 이 몸이 새 몸처럼 가뿐해지거나 쌩쌩해지거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해질 수는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머리든 몸이든 나이를 먹어도 단련하면 얼마든지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안다. 유능함을 넘어, 가능하다면 여유와 다정함까지도 겸비하고 싶다. 그럴 만한 체력과 컨디션을 유지하고 싶다. 그래서 요즘은 요가 말고도 간간이 조깅을 하고 계단을 오른다. 내 몸과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기 위해. 통증의 기록이 아닌 움직임의 기쁨이 담긴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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