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OO에 "두려움"이 들어갔던가... 주어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자리에 뭐가 들어가든 웬만큼 아귀가 맞아, 살면서 참 자주 떠오른다. 앞에서 다가와서 나를 관통하고 어버버 하는 새에 뒤로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살면서 우리가 정신 똑바로 차려 극복하고 넘어가는 게 몇 가지나 있을까. 결국 익숙해지거나 무뎌지거나 하며 계속 걸어간다.
OO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다, 라는 말은 일생에 한번 겪거나 아니면 그 반대편으로 매일 규칙적으로 찾아오는 일상 정도의 빈도가 아닌 그 중간, 그러니까 받아놓은 날은 없지만 때때로 맞이하는 어떤 "사건"같은 일들에 붙여지면 더 적절하다. 만남과 헤어짐, 퇴직, 이직 같은 그런 일.
스크래치는 남고 극복은 없다. 다만 익숙할 뿐.
연초에 약속한 연 총 4회의 상여금 중 하반기 2회가 지급되지 않았다. 내 자리는 가동률 100프론데 애석하게도 회사는 침몰하고 있다.
어차피 상여금은 구두 약속이고, 서류에 명시된 연봉만으로도 나쁘지 않았고 매 해 섭섭지 않게 인상된 것까지 생각하면 그 덕에 참을 만은 했다. 시국도 어려우니 조금 버텨보자, 마음먹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여름휴가 이후부터는 급여일이 미뤄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루 그다음 달엔 일주일. 버티는 을 생활의 갖가지 면모에는 자신이 있는 나지만 급여만큼은 건드리면 안 된다. 그거 말고도 파트너 업체에서 대금 문제로 전화가 오고 명절이면 줄을 서던 선물세트의 행렬이 퍽 짧아지는 등 이미 조짐은 흘러넘친다.
나는 성큼성큼 마음의 준비를 한다. 작은 회사에 다년간 다녀본 노하우는 기술적인 게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초심을 잃지 않는 마음. 그 초심이란 "열심히 해야지"의 결심이 아니다. 오늘만 산다는 마음가짐이다.
작은 회사에서 직원으로 살아남는 방법 따윈 없다. 내가 특별히 애쓸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대충 허투루 해나간다는 게 아니다. 내가 하는 직무에는 철저히 전문적이어야 함은 기본 아닌가? 그건 나중의 나를 위해서도, 매일의 출퇴근을 헛수고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탑재해야 할 능력이다.
다만, 나의 능력이나 노력과 상관이 없이 계속 변수가 생기고 파도를 타고 침몰하는 게 작은 회사이다.
대기업이야 오르락내리락하는 사이클이 잘 안 보이겠지만 작은 회사는 (MSG를 좀 치자면) 그게 매일 보인다. 경험자인 내 눈엔, 적어도 달 간격으로는 그 사이클이 확실히 보인다.
그래서 작은 회사에서 일할 때 가장 필요한 건 노력하는 자세가 아니라 스스로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다.
회사의 침몰은 내 탓이 아니라는 생각. 나는 일개 직원이고 회사는 내가 아니라는 팩트. 포트폴리오만 똘똘하다면 직장은 무너져도 나의 직업은 건재하니 형태의 변화는 있을지언정 어디서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
그건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걸 깨닫게 되기까진 나에게도 적잖은 시간이 흘렀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직장을 다닐 땐 회사가 나인 줄 알았다. 물론 그곳에 몸담고 있을 때 뽑아먹을 수 있는 건 다 뽑아먹고 나와야 한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어깨뽕이든 인프라이든 은행 대출이든 인간관계든. 법에 저촉되지 않고 양심에 털나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20년 가까이 유목민처럼 경력을 쌓다 보니 어느 날부턴가 나이를 따지지 않고 숙달된 경력직을 원하는 <작은 회사>들만 나의 구직을 받아주는 시점이 왔다. 그래서 회사 내 자리에 거의 원룸 사이즈의 짐을 늘어놓고 지내던 장그래 시절 이후로 나는 내일 당장 나가더라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짐만 놓고 지낸다.
퇴사 시 칫솔은 버리고 치약과 텀블러와 슬리퍼는 그때의 상태에 따라 정리한다.
오랜만에 찾아온, 처음이 아니라 익숙한 시간. 이번 회사도 몇 가지 교훈을 남기며 타이타닉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엔... 그동안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그것. 실업급여를 (부푼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