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이삼 미터의 거리

by 고양이

“몇 학번이세요?”

처음 찾아간 근무지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건넨 첫 질문이었다.

자기소개도, 이름도 아니었다. 학번.

그는 덧붙였다. “그냥 여쭤보는 거예요.”


'그냥 물어볼 거면 애초에 묻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삼켰다.

학번이 늦으면 말을 놓을 준비가 되어 있고 학번이 빠르면 선배 대접을 해주겠다는 뜻일까.
호칭과 태도를 미리 계산하는 질문은 이제 꽤 식상한 편이지만 적응하기 힘들다.
나는 그 계산식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어서 그는 물었다.

“혹시 기혼이세요, 미혼이세요?”

결혼했으면 안정된 사람으로 분류하고 안 했으면 소개팅이라도 연결해 줄 요량일까.
나이와 결혼 여부를 빼고 나면 더 묻고 싶은 것도 없다는 듯한 그의 빈곤한 상상력 앞에서 나는 일부러 어리숙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 빨리 걸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삼 미터쯤 거리를 두었다.

이래서 물리적인 거리는 생각의 거리와 비슷하다고 걸으며 생각했다.



오랜만에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 출근준비를 한다.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 뭐 한다고 롱코트를 입고 왔을까. 패딩이나 걸칠걸. 그래도 첫인사 자리인데, 조금은 단정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신호등마다 주춤거리다가 직선도로에서 엑셀을 지그시 밟았다.
오랜만에 듣는 으르렁거리는 엔진 소리에 잠이 달아났다.


워크숍 첫날. 9시까지 회의실로 오라는 공지가 있었다.

정각에 도착했을 때 회의실 맨 뒷자리에 서너 명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입자, 처음 온 사람들.

낯선 곳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비슷한 자세를 취한다. 어깨는 약간 움츠러들고 눈은 갈 곳을 몰라 책상 위의 책자를 오래 들여다본다.
할 일을 찾는 척하지만 사실은 자리를 찾고 있는 중이다.


“안녕하세요.”
작게 인사를 건네고 맨 뒷자리에서 두 번째에 앉았다.(맨 뒷자리에 앉는 건 조금 양심에 찔린다.)

9시가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시계를 한 번, 문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뭐지. 분명 9시까지라고 했는데.'

잠시 후 사회자가 들어와 말했다.
“9시 30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 한마디로 알게 되었다.

기존 구성원들에게는 어쩐지 공유된 시간이 있었고 정확한 문장대로만 움직인 사람들은 모두 이곳, 뒷자리에 모여 있다는 걸.



'첫날부터 군기 잡기냐.'
아니면 그냥 이렇게 굴러가던 조직의 관성일까.

혁신을 말하던 사람들이었다. 변화를 강조하던 자리였다.
그런데 시작 시간조차 투명하지 않은 곳에서 무엇을 새롭게 하겠다는 걸까.

오전과 오후, 사람들은 두서없이 말을 이어갔다.
각자가 오래 붙들고 있었던 이야기들. 아주 세세하고 구체적인 경험들.


나는 항상 방향이 궁금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이 자리에 모였는가.'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질문을 꺼내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는 그들에게는 너무 크거나 막연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집요하게 반복한 세부적인 문제들은 어쩌면 그들에겐 생존의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길을 묻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의욕도)
그들은 마치 오늘을 건너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어느 쪽이 더 지엽적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나는 여전히 이삼 미터쯤 떨어진 자리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까이 가지도 완전히 물러서지도 않은 채.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의 첫 태도는 열정 혹은 순응이 아니라 잠시 거리를 두는 일일지도 모른다.

관찰하기 위해. 그리고 내가 어디에 설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보슬비는 그날 오후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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