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만(小滿)을 그리다

손으로 만드는 수수한 평화 1

by 버들아씨

일 년 중 언제를 제일 좋아하냐 누가 물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절기 소만(小滿)을 가운데 둔 5월 중순부터 6월 초순이라고 말할 것이다.


초록 속 연두빛이 빠지기 시작하고,

노랑 분홍이 하얀 꽃으로 바뀌며,

붉은 양귀비, 하얀 데이지, 청보라 수레국화가 모네의 그림처럼 어우러지 나날들.


이 아름다운 날들을 놓칠세라 주말이면 눈뜨자마자 서둘러 집을 나선다.

츄리닝, 운동화, 챙이 큰 모자를 눌러쓴다. 선크림도 듬뿍 바른다.

주머니엔 천 원 몇 장. 편의점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산다.

내가 가는 그곳에선 커피값이 천 원.

그 커피가 언젠가 길거리 블라인드 테스트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커피를 홀짝이며 아파트단지를 낀 공원을 지나

근처 산기슭의 주말농장을 지나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길 터놓은 숲을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걷는다.

팔 벌려 안기 좋은 나무 사이를 걸으면 내 몸에도 연한 초록물이 들 것 같다.

걷다가 땀이 날 때쯤 문득 코끝을 스치는 향.

고개를 돌리면, 하얀 찔레꽃이 피어있다.


이 순간의 나는 행복해서 미칠 것 같다.

'와! 너무 좋아요, 감사하고 고마워요.'

지난 시간의 회한과 자책들은 초록그늘 속으로 흩어지고,

앞으로 내가 저지를 모든 잘못들 조차

'무슨 일이 벌어져도 네 잘못이 아니다.'*

미리 용서를 받는 듯하다.

2010년 수채화, 소만(小滿), 72.7*53.0

십오 년 전 오래된 아파트로 가는 숲길을 걷다가,

팔 벌려 안기 딱 좋을 나무들과 그 나무의 발치에서 솟아난 작고 여린 가지들을 보았다.

가지들은 굵은 기둥 같은 도련님에 가려진, 양반집 서자 같았다.

존재를 무시받던 어린 가지들이

너그러운 소만의 기운에 용기를 얻어

'나도 여기 있습니다' 줄기를 뻗으며 외치는 듯하였다.


5월 21일 소만을 앞두고,

십오 년 전 그렸던 이 그림을 꺼내며 나는

그때 '나도 여기 있습니다.'

어린가지들의 외침을 들었던 소만은, 틀림없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네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겁내지 말고 너를 귀히 여기렴'

이렇게 응답했을 것만 같다.


한창 수채화에 몰두하던 시절,

당시 <공무원 미술대전>에 이 그림을 내보기로 하였다.

1차로 작품사진을 제출하였는데, 탈락하였다.

첫 단계부터 통과하지 못하니 좀 실망하였고,

아무리 신통찮은 실력이었을지라도

왜 떨어졌는지 알아야 마음이 정리될 것 같았다.

그래서 찾아낸 이유인즉슨

'공무원미술대전은 '치열한 삶의 현장',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그 향기'같은 주제를 선호하는 거야. 그러니 나무만 있는 그림이 통과될 리 없지'였다.

나는 내 그림이 공무원미술대전의 취지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빠르게 결론 내리고 잊어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정신승리는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쯤엔 소만을 맞이하는 나만의 의식이 있다.

그림 <소만(小滿)>을 꺼내 거실장 위에 세워 놓는다.

해지기 전과 주말 아침에는 숲길을 찾아 걸으며 초록을 듬뿍 마신다.

나희덕 시인의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을 책장에서 꺼낸다.

시집을 펼쳐 '소만'을 읽는다.

나의 그늘을 용서해 주는 소만에 감사한다.



소만 小滿

나희덕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소만(小滿) 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소만(小滿) 지나면 들리는 소리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



* TV드라마 <도깨비>의 대사 인용

너와 함께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네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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