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이의 입모양

을 보고 알아요.

by 버들아씨

숱 많은 긴 머리는 하나로 묶여 찰랑거리고,

우유가 좀 더 섞인 듯한 부드러운 모카라떼 빛 피부,

굵게 쌍꺼풀 진 큰 눈,

갈색 눈동자는 내 눈을 보지 않고 나의 어깨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입학식 때부터 눈에 띄었다.


5월 마지막 주, 너의 눈은 이제 내 턱 언저리까지 올라왔다가 가끔 내 얼굴 어딘가에 머문다.

입학한 지 3개월이 지나가는데,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너를 분홍이라 이름 짓는다.

우리 반은 알록달록 무지개반이기 때문이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서로 다른 색이지만

빨주노초파남보 함께 어울리면 곱고 예쁜 무지개가 되지요.

여기 모인 우리 반 친구들은, 이름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여러 가지 색깔처럼 다 달라요. 하지만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고, 도와주고 사이좋게 지내면 우리 반은 무지개처럼 예뻐지고 행복해질 거예요.

알록달록 서로 다른 빛깔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무지개처럼, 즐겁고 행복한 일 년을 우리 함께 만들어가요'


학기 초에 나는 아이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한다.

다른 학년을 맡았을 땐 아이들이 이 뜻을 바로 알아들는 것 같았지만,

지금 우리 일 학년 아가들, 무지개반이 되자는 이유를 알아듣긴 하는 거겠지?

꿈벅거리며 앉아있는 눈을 보며 생각한다.


3월의 1학년은, 잘 울었다.

모른다고 울고, 맘대로 할 수 없다고 울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고......

분홍이는울었다. 매번 울었다.

교과서 어디를 펴야 되는지 몰라서, 놀이가 바로 이해 안 되어서, 소리 내 말을 해야 되어서

역시나 울었다.


"유치원 때도 그랬어요"

아이들이 이른다.


나는 분홍이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우는 것은 안 돼요. 초등학생이니까. 우는 것으로 표현하는 건 안돼. 말하기 힘들면 손을 높이 들어요. 손든 것을 선생님이 못 보면 바로 앞으로 나와요. 선생님이 언제든 도와줄 거야."


손들기 연습을 시켜본다.

"높이, 그래. 더 높이 들어야 선생님이 볼 수 있지"


분홍이는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분홍색 옷을 자주 입는다. 연한 분홍, 베이지 분홍, 보랏빛 분홍.

그래서 분홍이는 분홍이다.

분홍이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분홍이의 이런 부분에 대해 분홍의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으므로

분홍이의 침묵이 혹시 조음구조등 신체적 문제 탓인지, 아니면 매우 소심하고 부끄럼 많은 성정 탓인지, 나아가 '선택적 함구증'은 아닌지...... 어느 날 조용히 불렀다.


"분홍아, 분홍이는 어떤 색을 좋아해? 선생님한테만 들리게 말해보렴"

최대한 분홍이 입 가까이 내 귀를 대고, 시각과 청각을 초집중시킨다.

......

"피......ㅋ"

나는 들었다. "핑크"

다행이다.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어쨌든 내 귀에 '피'와 'ㅋ'을 들려주었다.


"핑크를 좋아하는구나"

좋아하는 색깔이 핑크. 그러니 더욱더 분홍이다.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굴까?

......

"아......ㅃ"

입모양으로 '아'......입술을 달싹여 'ㅃ'한다.


"아빠를 좋아하는구나!"


분홍이는 그림을 그리고, 한글도 제법 쓰고, 율동을 하고, 줄넘기도 열심히 한다. 다른 어려움은 없다.

친구들과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논다. 단지 말을 안 하고 입술만 달싹거리는데, 아이들은 용케 또 분홍이의 의사를 알아차린다.


분홍이는 다섯 살 때 베트남인인 엄마랑 베트남에서 살다 왔다. 한국인인 아빠는 담임인 내가 엄마 말고 자신과 통화하길 원하였다. 분홍이가 집에서는 우리말을 잘한단다. 유치원 때도 처음엔 말을 안 하다가 서서히 익숙해지며 말을 했다고 한다. 성품이 너무 수줍고 소심해서 그런 것 같다 하였다.

나는 추측해 본다.

다섯 살에 한국에 와보니, 생김새도 달라, 사람들은 다른 말을 해, 모든 게 낯설어. 내가 하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면 어쩌지? 그 낯섦과 두려움이 수줍고 소극적인 성정과 합쳐져 초등학교라는 또 새로운 환경에서 말문을 닫아버리게 하는 건 아닐까.


5월이 지나가고 있다. 우리 분홍이는 언제 편안해지려나.

나는 이 상태가 길어질까 걱정되어 아빠의 동의를 받아 위클래스 상담을 신청하였다.


분홍이는 이제 울지 않는다.

어려운 게 있으면 앞으로 나온다. 무엇 때문에 왔는지 물어보면 몸을 꼬며 보일 듯 말 듯 입만 달싹거린다.

나는 짐작해서 알려준다. 분홍이는 총명하여 바로 해낸다.

그러나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며 발표해야 하는 수업이면

말을 안 한다고 분홍이만 제외시킬 수 없으므로


"작아도 괜찮아. 소리 내서 말해보렴. 할 수 있어요." 한다.

분홍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분홍아, 그럼 입모양으로라도 말해봐요"

나는 분홍이의 입모양을 보고 같이 따라 말하거나, 대신 친구들에게 전달해 준다.

'좀 더 큰소리로, 친구들이 들을 수 있게 말해보자' 하고 싶지만

달팽이처럼 움츠러든 분홍이에게 소리 내 말하라고 재촉하면 분홍이는 조개처럼 입을 더 꾸욱 다물어 버릴 것 같다.


5월 지나고, 6월 지나고, 여름방학 할 때쯤이면 좀 더 편안해진 분홍이가 단어로라도 소리 내 말해줄까.

그때까지 나는 분홍이를 부지런히 예뻐해 주며 래포를 쌓고, 입모양을 읽어줄 뿐이다. 입모양으로 말하다 가끔 한글자라도 소리가 들리면 엄청 칭찬해 주며 말이다.


다행히 아이들은

"너 왜 말 안 해?" "선생님, 분홍이는 왜 말 안 해요?"

하지 않는다.

분홍이가 말 안 해서 놀이가 중단되어도 분홍이를 탓하는 아이들은 없다.

우리 반이 무지개반인 이유를 알아듣고 있나 보다.


분홍아,

새 아침 교실로 들어오는 너에게

선생님 혼자만

'어서 오세요.' 하는 인사 말고


너는 나의 눈을 보고

'안녕하세요.'

나도 너의 눈을 보며

'어서 오세요'

서로 마주 보며 큰 소리로 아침인사를 나누고 싶다.

*대문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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