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댁의 취미 3

달콤로맨스와 레알다큐의 쓴 맛, 사주단자(四柱單子)

by 버들아씨

아래 글에 이어집니다.



흰 눈이 내려앉을 때까지

3개월 안에,

만나고 사귀고 상견례하고 예단이 오가고

웨딩사진 찍고 식을 올리는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신혼여행까지 마치고 돌아온 우리의 새 집.

짐 정리를 하며 붉은 비단 꾸러미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게 뭐지? 언제 이것이 내 짐 속에 들어왔지?

결혼한복 맞출 때 알록달록 비단과 고운 노리개가 많던 한복집에서 예쁜 꾸미로 같이 넣어준 건가?

빨간 바탕에 기계자수된 모란이 고와서 나는 이불장 맨 밑칸에 그것을 넣어두었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혼서(婚書)*야"


'혼서?'

웨딩드레스, 턱시도를 입고 결혼하는 세상에

'웬 혼서!'

혼서라니 내 결혼과 관련된 것 같은데,

'형식적으로 남은 전통혼례의 유산인가 보다. 보나 마나 결혼을 축복한다는 한자들이 비스무리 프린트되어 있겠지.'


나는 이것을 누가 보냈고, 누가 이것을 받았으며,

여기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보자기를 풀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다시 이불장 맨 밑칸에 쑤욱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아이 둘을 낳고, 그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고,

새댁의 머리에 하나 둘 흰 눈이 내려앉을 때까지 말이다.


그 혼서가 바로,

새댁이 만들던 사주상자 안에 넣는 사주단자(四柱單子)**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달콤 로맨스와 레알 다큐의 쓴 맛

3개월 사귀고 결혼하면서 나는

오만한 낙관(樂觀)을 하였던 것이 틀림없었다.

선(先)결혼 후(後)연애.

결혼해서 연애하듯 서로를 더 알아가면 되지. 오히려 더 설레고 즐거울 거야.

'결혼시작 요이 땅!' 하며, 하이틴로맨스에나 있을 법한 달콤한 결혼로맨스를 상상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는 짐작하는 대로다.

오래 사귄 이 들도 서로의 낯선 모습과 예상치 못했던 상황들이 두더지게임처럼 펼쳐지는 게 결혼생활이다 증언하거늘

짧은 호감과 판단으로

마치 결혼을 위한 결혼을 한 것만 같던 우리들에게,

결혼은 레알로 실전임을 내내 확인케 해 주었다.

'너희 둘은 너무도 다른 가치관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제는 깨닫겠느냐.'

회초리 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매서운 회초리에도 우리는 고집을 세우며 자신의 생각과 습관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주 다툼이 일었고, 두터운 벽이 쌓여갔다. 갈등이 최고조에 이를 땐 '그럴 거면 이혼해'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냉전기를 보내고, 다시 또 풀어지는 생활을 반복했다.


기대했던 달콤 로맨스는 어디 가고,

레알 다큐의 쓴 맛이 혀 끝에 머물렀다.

결혼이라는 연(緣)이 만들어 준 질리게도 질긴 끈으로 서로를 이은 채,

미운 정 고운 정만이 서로를 구할 것이라 여기며

'살면 살아진다는 듯이' 살았다.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가

일 년 사계절을 만나본다면 우린 결혼했을까.



새댁이 그 여자가 되어

이제 사주상자를 만들던 검은 머리 새댁은 늘어가는 흰머리를 주기적으로 염색하는 중년이 되었다. 기미가 내려앉은 얼굴에 아이보리색 파운데이션을 두드려대는 그 여자,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줌마가 되었다.


브런치 <그 여자의 취미생활>에 글을 쓰기 위해 사주상자를 꺼내보던 그 여자, 바로 나는

이불장 깊숙이 밀어놓았던 붉은 보자기를 문득 떠올렸다. 그 혼서라는 것과 사주상자가 뭔가 연결되리라는 생각이 신통방통 대뇌를 스쳤다.

그리고 진실로 몇 십 년 만에 마침내 보자기를 풀어보았다.

보자기는 안쪽이 푸른 비단으로 맞대어진 겹보자기였다. 그 안에 청실홍실이 묶여진 사각거리는 얇은 꾸러미가 또 있었고, 접힌 문서와 봉투 1개가 들어있었다.


세월은 새댁이 만들었던 때깔 곱던 사주상자를 해지고 낡게 만들었건만, 새댁이 되기 전에 받았을 붉은 보자기 속의 그것은 색만 약간 노래졌을 뿐, 찢어지지도 구겨지지도 않고 사각이 번듯하게 온전하였다.



한 개의 문서와 한 개 의 봉투.

문서를 펼치고 세로로 적힌 한자들을 훑었다.

검은 것은 글자고 하얀 것은 종이로다.

알듯 말듯한 한자들을 떠듬떠듬 눈으로 쓸던 나는 드디어 읽을 수 있는 몇 개의 글자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낯익은 이름이었다.


全州后人 李○○ 謹拜

(전주후인 이○○ 근배)


그 문서에는 시아버지 함자가 검은 먹으로 또렷이 적혀 있었다.


"어랏! 아버님 이름이 쓰여있네. 그럼 이 혼서는 진짜였어? 예를 차린다고 그럴듯한 문구를 시늉으로 복사해 놓은 게 아니었어?"



'쿵'

묵직한 어떤 것이 심장언저리로 떨어지는듯했다.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하였다.

"에이~참, 나이 드니 자꾸 눈물이 많아지네,

여성호르몬이 줄어들면 눈물도 줄어들어야지 왜 눈물은 수도꼭지마냥 비틀면 뚝뚝 떨어지냐고."

혼잣말하며 한자로 된 문장을 다시 읽어 보았다.

역시 반절은 알고 반절은 모르겠다.

이럴 땐 AI비서를 불러야지.


AI도움을 받아 해석한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존귀하고 자애로운 뜻을 허락해 주셨기에, 이제 몸소 이곳에 나아가 조상께서 물려주신 혼례의 예를 행하려 합니다. 예식 준비가 부족하나, 삼가 귀댁께서 너그러이 살펴주시길 바라며 이 문서를 정중히 올립니다.

때는 을해년 3월 23일 전주 후손 이00 삼가 올립니다.'



엄마가 말한 혼서는, 내가 만들던 사주상자***에 넣는 바로 그 사주단자(四柱單子) 였다.



* 다음 편에......





*혼서(婚書)는 전통 혼례에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공식적인 서신으로, 결혼을 허락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뜻과 예를 갖춰 보내는 문서(출처: Copilot)


**사주단자(四柱單子)

사주(四柱):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간지(干支)로 나타낸 것

단자(單子): 내용을 적은 간단한 문서 또는 편지

즉, 신랑의 사주(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적은 문서를 의미하며, 결혼을 위한 청혼의 상징.(출처: Copilot)


***사주상자

자녀의 혼례를 준비할 때, 상대방 집에 보내는 사주단자를 이 상자에 넣어 전달하거나 보관함.(출처: Copilot)


****혼서와 사주상자는 서로 다른 의미와 절차를 가졌지만 때로 혼용하여 쓰이기도 한다.(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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