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댁의 취미 4

부부의 초상(肖像), 마지막 사주상자

by 버들아씨

에 이어집니다.



붉은 보자기의 정체

핑 돈 눈물이 떨어질까 눈을 끔뻑끔뻑거리며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겉면에는

○生貞宅下執事入納(○생정댁하집사입납)

'○씨 댁 아가씨께 이 문서를 삼가 드립니다'


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고


봉투 안에는

○○十一月十三日寅時生(○○십일월십삼일인시생)

'○○년 십일월 십삼일 인시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남편의 생년월일시 즉, 사주(四柱)가 들어있었다.


내가 뭣도 모르고, 아니 뭣도 알려하지 않은 채 이불장 깊숙이 밀어 넣고 까마득히 잊어버린 붉은 보자기의 정체가 이로써 분명히 드러났다.


사주단자(四柱單子)!

새댁이었던 그 여자가 고운 한지 위에 원앙과 연꽃과 박쥐와 온갖 상서로운 문양을 붙이며 정성스레 만들었던 사주상자, 그 사주상자에 들어갈 진짜 주인공이 붉은 보자기 안에 있었던 것이다.



엄마와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이기를 바라며 '살아지듯' 살아가던 어느 날, 견디지 못한 내가 엄마에게 결국 털어놨을 것이다.


엄마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 이혼하면 콱 죽어버릴란다"


아빠의 술과 여자 때문에 힘든 삶을 살고도

아빠와 갈라서지 않았던 엄마는 나와 남편의 갈등을 너무도 배부른 투정이라 간주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나를 누구인들

이해해 줄까.

가슴이 막혀왔지만 '콱 죽어버릴란다'가 파생시킬 것들이 무서웠다. 엄마를 죽게 하면서까지 이혼을 감행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포기하였고 두 번 다시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여러 해가 흐르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지방의 어느 절에서 49제를 마친 후, 덕이 높고 혜안이 있어 '모든 것을 두루 잘 꿰뚫어 보신다'는 큰스님 앞에 가족들이 모여 앉았다.

누군가 물었다.

'남편과 내가 잘 어울리냐'고

잠시 남편과 나를 들여다보시던 스님. 뭔가를 생각하듯 뜸 들이다 말씀하셨다.


"오십 중간쯤 되면 잘 지내겠구먼"


모두들 별생각 없이 하하하 웃었다.


'스님도 차암, 으르렁대던 부부들도 오십 넘으면 '내 등 긁어줄 사람은 그래도 서로 밖에 없노라' 그냥저냥 산다던데...... 그런 뜻의 말씀이신건가.' 다들 웃어넘겼지만,

나는 가슴이 서늘했다. 그땐 오십이 아득했었다.



부부의 초상(肖像)

어느새 스님이 말씀하신 오십 중간을 지나며 나는 마지막 사주상자를 꺼내본다.

위 회색 사주상자는 2편에서 글로 쓴 연노란 송화색 상자와 한 세트다.


이 사주상자는 덮개의 바탕을 회색으로 하고 그 위에 흰색 한지를 두 겹으로 한 후 격자무늬를 새겨 덧붙였다. 그리고 화초길상문* 형태의 목숨 수(壽)를 가운데와 옆에 오려 붙였다.

속상자의 분홍과 노란 바탕에는 쌍 희(囍)**를, 모서리에는 박쥐문(蝠紋)*** 잘라 붙였다.

'오래 살고(壽), 복 받고(福), 기쁨(囍)이 가득하라'는 의미를 마지막 사주상자에 담은 것이다.


누런 얼룩이 군데군데 낀 회색빛 사주상자를 본다.

덮개 상자와 달리 속상자의 분홍과 노랑바탕은 긴 세월의 때가 미처 닿지 않은 듯 고운 색감이 제법 그대로다.


공예품 전시회에 내기 위해 세트로 만들었던 사주상자 두 개.

나는 두 개의 상자를 나란히 놓고 가만히 손으로 쓸어보았다.

문득 두 개의 상자가 남편과 나의 초상(肖像)처럼 느껴졌다.

얼굴의 기미같이 갈색빛이 섞여가는 송화색 상자는 바로 나,

어느새 반백(半白)이 된 은발 같은 회색 상자는 바로 남편.

상자덮개는 나와 남편의 겉모습처럼 세월이 스며 낡아가고 있으되, 다홍과 노랑, 분홍과 노랑의 속 상자는 세월의 낙수에도 여전히 유순하고 부드러운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무뎌진 피부와 무표정한 얼굴 저 속 깊이에 생채기 나기 쉬운 여린 마음을 숨기듯 가지고 있었던 우리들처럼.



조용히 건네주는 말

그때 스님은 우리를 꿰뚫어 보셨음이 틀림없다.

마치 소 닭 보듯한 둘 사이를 알아채시곤 '오십 중간즈음 되면 좋아질 것'이라는 '플라시보'처방을 내리신 것이다.

서로를 안쓰러이 여기며 연민으로 바라볼 때가 올 테니 기다려보라고.

좋아질 테니 잘 견디어보라고.

여태껏 잊지 않고 있던 스님의 말씀을 다시금 떠올리며, 사주단자를 보자기로 단정히 싸서 사주상자에 넣는다.

청실홍실 맺을 약속으로 한때 더욱 발그레 고왔을 사주단자를 이제야 제자리 찾아 넣어준다.

엄마가 '혼서'라 말했던 그때, 그 안에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 보자기 펼쳐 꺼내봤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더라면 때깔 곱던 사주상자 안에 바로 그것을 넣어두었을 것이고, 뒤늦게 그것을 발견하고 눈물이 핑 돈 채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새댁이 취미로 만들었던 사주상자.

얼룩이 생기고 모서리가 해지고 문양도 군데군데 뜯겨졌지만 여전히 그 빛깔과 형태를 유지한 채 내 곁에 남아있는, 이제는 그 여자의 사주상자.


흐르는 세월 속에 낡아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지만, 때때로 잘 닦고 살펴주면 그 여자의 사주상자는 기품 있게 낡아갈 것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 나이 들어 늙어가는 것도 어찌할 수 없지만, 지금을 감사하며 너그러이 늙어가는 것도 그 자체로 그냥 아름다울 것이다.


낡아감을 안쓰러워하며 서로 같이 늙어가는 결혼생활.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라고 오랜만에 꺼내본 사주상자가, 뒤늦게 발견한 사주단자가 조용히 내게 말 건네준다.


끝.




* 화초길상문(花草吉祥紋)은 전통 문양 용어로

花草(화초): 꽃과 풀

吉祥(길상): 좋은 징조, 복과 행운을 뜻하는 상서로운 의미

紋(문): 무늬, 문양

즉, 꽃과 풀을 소재로 하여 복과 번영,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은 문양을 말한다.(챗지피티)

** 쌍희(雙喜)는 한자로 囍라고 쓰며, ‘희(喜)’자를 두 번 겹쳐 놓은 글자. 雙喜: ‘두 겹의 기쁨’이라는 뜻. 주로 결혼식에서 신랑·신부 각각의 기쁨을 합친 것을 의미한다.(챗지피티)

*** 모서리에 붙인 박쥐문(蝠紋)은 한자 ‘박쥐’(蝠)와 ‘복’(福)이 발음이 같아, 복(福)을 불러온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문양이다.(챗지피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새댁의 취미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