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대파를 뽑아갔을까

by 버들아씨

산기슭 주말농장을 지날 때면,

몇 년 전 내가 지었던 텃밭 농사가 문득 떠오른다.


2021년과 2022년, 나는 연이어 구청에서 운영하는 <도시농부 텃밭>에 당첨되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 2년 내리 뽑혔으니, 상당히 운이 좋았던 셈이다. 게다가 우리 집에서 걸어 20분 거리, 당시 내 산책 코스의 중간쯤에 텃밭이 위치한 것도 매우 감사한 일이었다. 두어 평 남짓한 크기였지만,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 집 곁에 딸린 작은 밭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던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자타공인 효자남편은 격주로 지방에 내려가 아버님의 소일거리 농사를 거들었다. 아버님 곁에서 보고 들은 풍월로 '지금은 이걸 심어야 한다. 비료는 이때 주어야 한다' 이래라저래라 농사감독인양 한두 마디 툭 던질 뿐, 남편은 텃밭을 '한 번도, 전혀, 네버' 들여다보지 않았다. 남편뿐이랴. 도시출생 아들과 딸은 '농사의 농'자도 관심 없고 각자 자기 일에 몰두하느라 바빴다. 텃밭은 오로지 아내와 엄마를 위한 공간이라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고맙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였다.


이래저래 텃밭일은 나 혼잣일이 되었다.

나는 주말마다 밭에 가서 거름을 뿌리고, 이랑을 타고, 모종을 심고, 물을 주고, 풀을 뽑고, 폭우에 쓰러진 작물을 일으켜 세우며 열심히 일하였다. 모르는 것은 인터넷으로 찾고 수시로 이웃 텃밭을 곁눈질하며 밭을 일궜다.

그 소소한 재미에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주말텃밭은 오히려 나의 한숨을 돌리고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케렌시아(Querencia)였다.

줄지어 심어놨던 대파

그러던 초가을쯤, 아버님 밭에서 대파 몇 뿌리를 캐내와 나의 작은 텃밭에 심게 되었다.

텃밭에 심어놓고 오며 가며 필요한 만큼씩 뽑아먹으면 참 좋겠다 싶었다.

위아래 초록과 흰색 옷을 차려입은 듯 뾰족한 잎을 세우며 쑥쑥 자라는 대파의 모습이 흐뭇했다.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주말에도,

나는 배낭에 간단한 농기구를 챙겨 넣고 텃밭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텃밭과 반대쪽 산기슭으로 먼저 가서, 40분여 야트막한 능선을 타고 텃밭 쪽으로 내려갔다.

농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니, 저만치 보이는 나의 텃밭 한 구석이 왠지 휑뎅그레하게 느껴졌다.

나란히 줄지어 심어놓았던 대파가 머리털 빠진 것처럼 한 뭉테기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작년에는 텃밭추수 후 모아놓은 지주대가 사라졌었다. 나는 미리미리 수거하지 않은 내 탓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런 일이 또 생기니 몹시 속상했다.

왜 남의 것을 자꾸 가져가나. 파 값이 얼마나 된다고 뽑아가나.

이 작은 텃밭, 겨우 열몇 뿌리 밖에 안 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뽑아갔겠구나 생각하니 더욱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가 이런 뜻 아닌가 하였다.


둘러보니, 다른 몇몇 밭도 비슷한 상황 같았다.

'농작물 가져가면 처벌한다'는 현수막이 농장 가장자리에 두 개 더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심했다.


- 경찰에 신고할까? 구청에 민원을 넣을까?


- 아냐, cctv도 없는데 어떻게 찾겠어. 공권력 낭비에, 내 에너지만 낭비하게 될 거야.


- 그럼 그냥 넘어가? 이 참에 경종을 울려야 해!


- 그렇지만 대파 몇 뿌리로 신고까지 하는 건 좀.....


마치 내 귀 양쪽에 두 마리 늑대가 속삭이는 듯, 나는 이랬다 저랬다 갈팡질팡하였다.

하지만 귀차니즘이 발동하고, 좀스런 인간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결국 이겨서, 실컷 분개만 하다 제 풀에 맥이 풀리고 말았다.


그리고 남아있는 찜찜한 마음을 걷어내기 위해, 대파를 뽑아간 누군가를 상상하기 시작하였다.


- 그 사람은 분명 형편이 어려웠을 거야. 명절은 다가오고 뭐라도 상을 차려야 할 텐데, 동전 한 푼이 아쉬웠어. 그래서 이 근처를 오가다 마침 눈에 띄는 농작물을 몇 개 가져가기로 한 거야.

내 밭의 대파를 뽑아간 건 차례상에 필요한 산적을 만들기 위해서였어. 초록색 파를 꼬치에 꿰어야 색깔도 예쁘고 맛도 더 있잖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파를 뽑아갔던 거지. 미안하니까 가져간 것보다는 조금 더 남겨두고. -


이렇게 나는 소설을 써가며 대파도둑님에 대한 괘씸함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을 몸소 실천하듯,

다음과 같이 팻말을 붙이며 조용히 '대파도난사건'을 자체종결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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