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주름이 주는 선물
모방송국의 <끝사랑>이라는 연애프로그램을 시청한 적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은 50대 이상 남녀들로 미혼, 이혼, 사별 등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 사랑을 찾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편지를 쓰고, 호감을 표하고, 데이트를 하며 서로를 알아갔다.
나는 무척 흥미로웠다.
적잖은 세월을 산 그들의 연애세포는 어떻게 살아날까.
어떤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고 설레어할까.
살아온 관록은 연애 전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사랑으로 인해 생기는 50대의 감정과 서사는 젊은 사람들과 같을까 다를까?
출연자들은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멋스러웠다. 모두 자기 관리 끝판왕들 같았다.
나는 여성 출연자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우아한 그녀들은 날씬한 몸매로 여러 스타일의 옷차림을 너끈히 소화하였다. 또 각양각색 액세서리로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빛내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진행될수록, 서로 다른 스타일로 매력을 발산하던 그녀들에게서 나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였다.
바로 ‘진주’였다.
그녀들은 다섯 명 모두 진주로 된 장신구를 수시로 착용하고 등장하였다. 작은 진주, 큰 진주, 우윳빛 진주, 갈색진주, 흑진주 등을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으로 취향에 맞게 연출하고 있었다. 진주 아닌 장신구도 있었지만 분명, 진주는 그녀들의 공통분모였다.
왜 다섯 명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진주일까. 호기심이 일었다.
서양 드라마 속 나이 든 여성들도 진주목걸이를 많이 하던데,
그녀들이 즐겨 착용하는 장신구가 다이아몬드도 아니고, 금도 아니고, 루비, 사파이어도 아닌 ‘진주’인 이유가 무엇일까.
진주가 다른 보석들보다 그녀들의 얼굴과 자태를 더욱 특별하게 빛내주기 때문일까?
확실히, 부드럽게 빛나는 동그란 진주는, 적잖은 세월을 산 그녀들의 얼굴을 환하게 밝혀주며 우아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나는 진주의 은은한 빛깔, 동그란 모양이 주는 클래식함이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단정한 고급스러움을 주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녀들이 진주를 애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랬기에, 진주에 별 관심이 없던 나는 그녀들의 진주가 더욱 궁금해졌다.
오래전, 내가 받은 결혼예물에는 진주가 없었다.
원하는 것을 골라보라며 데려간 보석가게에서 시어머니는 "진주는 눈물과 비슷해서 결혼예물로 잘 쓰지 않는대." 말하셨다. 진주가 눈물방울처럼 동그란 모양이니 그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불만이 없었다. 진주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진주가 눈물을 나타낸다는 세간의 속설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은 나중에 더 알게 되었다. ‘달의 눈물’이 진주라거나 '인어가 눈물을 흘리면 진주가 되어 떨어진다'는 옛이야기와 전설들이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서양 여러 곳에 심심찮게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를 앞두고 행여나 부부의 앞날에 눈물 흘릴 일이 생길까 시어머니는 뭐든지 가리고 가려 정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의 결혼예물에 진주가 빠진 것이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시어머니는 패키지여행이나 홈쇼핑에서 구입한 진주목걸이, 진주귀걸이, 진주브로치 등을 종종 내게 주셨다.
나는 그것들을 걸고 달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진주목걸이는 저절로 고개를 숙여지게 하는 듯 너무 무거웠다. 진주귀걸이 진주브로치는 나를 단박에 열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이게 심술을 부리는 듯했다. 결론은 '어울리지 않는다'였다. 나는 그것들을 서랍 깊은 곳에 밀어놓고 종내는 잊었다.
그러던 진주를 <끝사랑>을 보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은은한 고급스러움으로 얼굴을 환하게 밝혀주는 보석으로서의 진주, 그것뿐일까.
나이 든 여성들에게 진주가 잘 어울리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조개에 이물질이 들어가 살에 상처가 나면서
오랜 시간 겹겹이 만들어지는 것이 진주라지.
바로 조개의 아픔이 만든 결정체.
백팔번뇌를 이겨낸 스님의 동그란 사리처럼,
진주는
아픔의 눈물이 분비물이 되어 그 고통을 둥글게 빚어낸 것.
견뎌낸 그 시간들이 만들어준 단단한 옹이 같은 것.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흉터와 같은 것.
그래서 긴 세월의 희로애락을 지나온 나이 든 자에게 스며들듯 진주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진주는 눈물과 주름이 주는 선물인 것이다.
남들 다 알고 있는 것을 뒷북치듯 이제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중년이 되니 나도 저절로 진주가 좋아진다.
서랍 깊은 곳에 밀어놓았던 진주목걸이를 꺼내 걸어보았다.
예전만큼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다. 감당할만하다.
거울에 비춰보니 내 나이에 맞게 어울린다.
열 배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던 심술이 휘리릭 지나간 세월처럼 어느새 사라졌다.
진주귀걸이를 마저 달고 진주처럼 뽀얗게 웃어본다.
진주는 인생의 주름과 썩 잘 어울리는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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