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쌀밥과 미역국 그리고 초코케이크

by 버들아씨

딸은 설날에 태어났다. 음력 1월 1일.

구정을 쇠는 집이라 설차례를 마치고 떡국을 먹고 세배하고 쉬던 참이었다.

둘째 아이였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통증이 왔으므로 출산이 임박하였음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병원 가는 시간을 자꾸 미루었다. 첫아이를 통해 산고를 경험하였기에 또다시 겪을 그 고통이 너무 무서웠다.

아니까 더 두려운 것이다.

결국 시어머니의 걱정스러운 호통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어기적 어기적 남편의 부축을 받아 병원에 도착하였다.


“길순이를 낳을 뻔 하셨네요”

병원행을 참고 미루었던 바람에 이미 아기집이 60% 이상 열려 하마터면 병원 오는 길에 아기를 낳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이야 설날에 태어나면 더 특별하고 상서롭게 여기며 축하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명절에 아기를 낳을 경우,

모두 기뻐하고 모두 산모의 수고를 치하하지만,

하필 분주한 명절에 태어나는 '방정맞은' 아이라 여기는 분위기도 있었다.

명절 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며느리의 일손과 관련된 매우 차별적인 시선이다.


딸이 명절에 태어난 '방정맞은' 아이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으므로, 딸의 생일을 음력 1월 1일이 아닌

그해 설의 양력 0월 00일로 하기로 했다.


그래서 딸은 해마다 0월 00일에 생일을 맞는다.

생일을 맞이하여 딸이 좋아하는 초코케이크를 사고 흰밥을 짓고 미역국을 끓이려고 한다.


가족의 생일을 챙길 때면 꼭 흰쌀밥을 짓고 싶다.

'백세시대의 재앙'이라는 말이 있듯이 백 살까지 사는 것이 꼭 좋은 일이 되는 것만도 아니고,

백 세의 百과 백미의 白이 또 같은 뜻도 아니지만,

생일 때 친정엄마는 꼭 흰쌀밥을 지어주며

“백 살까지 오래오래 살라고 생일에는 흰쌀밥을 주는 것이랴~”

하셨다. 친정엄마를 따라 나도 가족의 생일에는 흰밥을 짓는다. 전기밥솥으로.


십몇 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는 초등교사로 자식 넷을 건사하느라 바쁘셨기도 했겠지만, 원체 살림에 흥미도 소질도 별로 없으셨다. 시누이들의 생일도 종종 훌쩍 건너뛰셨던 모양이다.

“엄마는 내 생일날 미역국이라도 끓여 준 적 있어?”

하는 시누이의 말에 시어머니는 멈칫하시더니, 바로

“니 생일엔 너 낳느라 죽을 만큼 고생한 엄마에게 미역국을 끓여줘야하는 거 아녀?”

당당히 말씀하셨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므로, 또 너무도 자연스레 당당히 말씀하셨으므로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러네, 그 말씀도 맞네!'

출산의 기쁨과 고통을 상징하는 미역국!

산모의 빠른 회복을 돕는 고맙고 지혜로운 음식.

딸의 생일에 끓이는 미역국은 엄마의 몫이기도 한 것이다.

그날 '고생했다' 나를 토닥이는 음식이기도 한 것이다.


아이를 낳을 때의 어마무시한 고통을 이제는 잊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을 겪거나, 병원에서 아픈 치료를 받거나 할 때는

'내가 아이를 둘씩이나 낳은 사람인데, 그 고통도 겪어낸 사람인데'

하며 힘을 내서 견딘다.


이제 생일상 준비를 하려 한다.

먼저, 딸의 장수를 염원하는 흰쌀밥

쌀을 씻어 밥솥에 넣는다.

세심히 살펴 물을 조절한다. 하얗고 윤기 나는 흰쌀밥을 기대한다.

다음, 엄마의 산고를 위로하는 미역국

마른미역을 꺼내 불린다. 맑은 것을 좋아하므로 기름에 볶지 않는다.

통통하게 살 오른 백합을 넣어 끓일 것이다.

초코케이크는 딸이 좋아하는 것이니 그냥.


'흰쌀밥과 미역국, 초코케이크'

됐다! 아이에 대한 축원과 산모에 대한 위로가 다 들어가 있다.

이 정도면 왕후장상의 잔치상 부럽지 않은 '생일 성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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