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본청에 있던 옛 정론관과 이제는 새 건물로 옮기면서 개명한 ‘소통관’. 즉 국회 출입기자실에는 언론사별로 칸막이가 쳐진 ‘부스’가 있다. 언론사별로 2~10명 정도 상주할 수 있게 해놓았는데, 어느 언론사 부스에나 대부분 국회의원들이 발간한 책들이 쌓여 있다. 수년 전부터 의원들이 책을 출간할 때마다 책을 부스로 가져다주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기사화되거나 기자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담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무료 배포하는 일을 지양하면서 의원과 식사자리에서 또는 의원실을 찾아갔을 때 선물로 주는 경우가 많다. (김영란법이 생긴 뒤 출판기념회에서 무료로 책을 나눠주는 것이 불법이 됐다고 한다.)
의정활동과 지역구 다지기에 바쁜 의원들이 실질적으로 책을 쓸 수 있을까? 그렇기에 대부분 당사자의 구술에 따라 보좌진이 집필하거나 대필 작가에게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루하루 마감에 쫓기는 기자들이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이런 책도 거의 펴보지 않고 장식용으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또 기자들이 보기에는 워낙 여러 권이 쌓여있기에 값어치가 떨어져 보이기도 하고 재미가 없는 출판기념회나 의정보고대회 등 행사용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간혹 모래 속 진주처럼 좋은 책을 발견하기도 하고 화제가 되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도 있다.
국회의원의 책
의원들의 책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자서전형과 기록·회고형, 그리고 정책형과 짜깁기형이다. 기자들이 읽기 좋은 책은 역시 자서전형이다. 존경심을 갖고 있는 독자에게는 어렸을 적 읽던 일종의 위인전과 마찬가지다. 그들의 집안 환경부터 성장사를 한 눈에 알 수 있고, 국회의원으로서 비전과 철학, 재미있는 경험담까지 가장 빠르게 알 수 있는 지름길이 된다. 지지자들에게도 호감을 더해주고, 자신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취재기자로서는 해당 국회의원을 만나기 전에 저서를 읽고 간다면 아무래도 호감을 살 수도 있다. 기사를 쓸 때도 그들의 행동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질문의 깊이도 더해질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2012년 7월 출간된 ‘안철수의 생각’. 대선주자로 거론되며 ‘안철수 현상’으로까지 불리면서 안 전 의원이 출간한 책은 큰 관심을 모았다. 새정치에 대한 열망으로 현상화됐지만 국민들은 그의 생각을 모르고 있었다. 의구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책 제목이 단순명료한 안철수의 생각으로 지어졌다고 여겨진다.
두 번째는 기록·회고형 책이다. 자신이 겪은 주요 사건에 대한 회고록, 정치인의 위상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파급력이 있다. 2013년 12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1219 끝이 시작이다’를 펴내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 책에는 “안철수 의원이 사퇴하지 않았다면 본인이 사퇴했을 것”이라는 등 대선 과정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책은 때론 폭로형 성격을 띠고 있다. 언급된 당사자와의 회고 내용이 엇갈리는 경우 논란이 재점화되고 설전이 오가기도 한다. 홍영표 의원이 2013년 10월 낸 ‘비망록-차마 말하지 못한 대선 패배의 진실'은 “안 의원이 대선 당시 후보직을 사퇴한 뒤 문 의원을 돕는 조건으로 신당 창당과 당의 전권을 요구했다”,“미래대통령 제안이 담긴 문건을 전달했다”는 등의 주장을 담아 논란이 되면서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세 번째는 정책집. 대표적으로 손학규 전 대표의 히트 슬로건인 ‘저녁이 있는 삶’ 같은 유형의 책이다. ‘손학규의 민생경제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복지와 진보적 성장 등 대선후보로서 자신의 정책 비전을 밝힌 책이지만, 정책이 주가 되다보니 재미가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네 번째는 짜깁기형이다. 기존에 나왔던 언론 인터뷰나 기고문, 토론회 발표문 등을 모아서 짜깁기한 형태인데, 이런 책은 정말 돈 주고 사기 아깝다.
정치인의 책을 산다면 전자의 두 유형을 고르고, 후자의 두 유형은 피해야 한다.
‘하수구’가 된 출판기념회
2014년 2월, 광역단체장에 출마한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A 의원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소책자 사이즈에 100페이지도 안되고 책 가격은 5000원. 앞선 2013년 9월에도 A 의원은 2500원짜리 70페이지 책을 내며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 정도면 ‘상습범’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기념회가 편법적 정치자금의 모금 창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오던 때였다. 시민단체 바른사회시민회의 조사에 따르면 2011년부터 올해 7월까지 국회의원 192명이 279차례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특히 선거나 국정감사를 앞두고 집중적으로 출판기념회가 개최됐다. 19대 총선이 열리기 전년도인 2011년에는 의원이, 국감 전인 지난해 9월만 45회, 올해 초부터 3월까지는 광역단체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의원들을 중심으로 36회나 열렸다.
책값은 평균 1만5000원 선이지만 기념회에서 받는 봉투는 사실 책값이 아닌 출판축하금 명목이다. 결혼식 축의금이 최소 5만 원부터 시작하듯 수십만 원짜리부터 몇 백만 원짜리 봉투도 있었다. 정치자금 모금회인 출판기념회를 2년여 만에 6번이나 연 의원도 있었다. C 의원은 “정치후원금의 한도가 연 1억5000만 원(선거가 있는 해에는 3억 원)인데 비현실적인 액수다보니 편법적으로 출판기념회로 편법적 모금을 할 수밖에 없다”며 “일종의 하수구”라고 필요악이란 점을 지적했다.
공직선거법 제103조5항
누구든지 선거일전 90일(선거일전 90일후에 실시사유가 확정된 보궐선거 등에 있어서는 그 선거의 실시사유가 확정된 때)부터 선거일까지 후보자(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자를 포함한다)와 관련있는 저서의 출판기념회를 개최할 수 없다.
현행법에서 출판기념회 관련 규정은 선거일 90일 전까지만 열 수 있도록 한 규정뿐이었다. 여야가 혁신과 ‘특권 내려놓기’를 외치면서 출판기념회 수입금 회계보고를 의무화하거나 횟수를 제한하거나 책값만 받도록 하는 등 방안은 나왔지만 한 번도 실천하지 않았다. 그렇게 곪아가던 상처가 결국 터져 나온 것이었다.
제 머리 못 깎던 의원들도 비난여론이 쇄도하자 뒤늦게 현행 출판기념회를 개선하기로 했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신학용 의원이 출판기념회에서 받은 수입금을 검찰이 입법로비를 위한 뇌물로 판단하고 기소한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은 아예 당론으로 출판기념회를 열지 말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난 뒤 출판기념회에서 금품 모금과 제공을 금지하고, 행사 개최 여부를 선관위에 의무적으로 신고하게 하는 ‘국회의원 출판기념회 관련 제도 개선’ 내용을 담은 정치자금법 개정안은 흐지부지됐다.
올해 4월 총선을 앞두고 선거에 나가는 후보, 임기를 마치는 의원 등 출판기념회가 봇물 터지듯 성행했다. 출판기념회에 출판사에서 나와 책값을 정가에 판매하면서 봉투 관행은 사라졌다지만 100권을 사는 식으로 실제로 대량 구매하는 식으로 일종의 로비를 하거나 암암리에 봉투를 건넨다는 편법이 이뤄진다는 소문은 여전하다.
당시 출판기념회를 둘러싼 의원들의 행태와 과정을 보면서 “정치인은 계속 조져야 돼”라는 정치부 선배들이 되내이던 말에 공감하게 됐다. 특권을 행사하는 국회의원들은 계속 감시하고 혼내야 된다. 국민들의 여론을 조성하는 언론이든, 법으로 구제하는 검찰이든. 매가 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