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 하다가 집에 가기 싫어졌습니다
요즘 회사에서 파트별로 돌아가며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재택근무라니 듣기만 해도 디지털 노마드적 느낌이다. 이런 삶은 내 인생엔 없을 줄 알았는데. 코로나 19 상황의 장기화로 회사는 급하게 화상회의 시스템을 도입했다. 끝내는 우리 사옥은 아니지만 계열사 건물 내 확진자가 나오는 바람에 사옥이 폐쇄되는 상황에 이르자, 전사 차원에서 시급하게 만든 재택근무 프로세스를 반강제로 도입하게 되었다.
나인 투 식스, 월화수목금 밖에 모르던 10년 차 직장인이 난생처음 재택근무를 하자 몸과 마음에 다양한 반응이 일어났다.
첫 번째 반응, 재택근무 하기 전날이 마치 휴가 전 날처럼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낀다. 어차피 아침 9시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야 하는 것은 사무실에서의 상황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눈을 뜨고 집 밖을 나갈 행색(?)을 갖추고 지하철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 반 이상이 소요된다. 이 시간을 가볍게 생략하고 침대에서 바로 노트북 앞으로 직행할 수 있다는 것은 무언가 알 수 없는 해방감을 주었다. 어쩌면 그동안 그저 회사에 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를 쓰고 있었던 건지도.
두 번째 반응, 5분 내 출근 완료 상황의 환희도 잠시, 재택근무 시스템에 접속하는 과정에서 깊은 빡침을 느꼈다. 시스템이 긴급하게 도입되다 보니 과도기적인 상황이라 인프라가 원활할 리 없었다. 더구나 예상보다 더 많은 인원이 동시에 재택근무를 하게 되며 담당 부서는 거의 업무 마비 상태.
우선 집에서 완벽한 업무 환경을 세팅하는데 무려 45분이 걸렸다. 그나마도 사내 메신저를 접속하면 업무망이 꺼지고, 메신저 창에 상대방은 쓰고 있는데 나는 보이지 않는 등 다양한 기현상이 일어났다. 편집 툴 같은 조금 무거운 프로그램을 작동하려고 보면 다운되기를 반복, 결국 편집 툴을 써야 하는 일은 내일 할 일로 미루었다.
세 번째 반응, 재택근무를 한 첫날 직감했다. 재택근무하는 일자가 늘어나면 분명 살이 찔 것이다. 평소 회사에서 격렬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집에서 일하는 것 만으로 운동량이 거의 '무'에 가까움을 느꼈다. 출퇴근길, 사무실에서 회의실 가는 길, 점심시간의 짧은 산책 만으로도 나는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재택근무를 하니 행동반경이 내 책상 주변 2~3미터를 벗어나지 않았다. 혼자 집에서 점심을 먹고, 고작 움직이는 건 집 안의 화장실을 몇 걸음 걸어가는 정도? 집에서 일하는 내 주변의 프리랜서 분들이 요가나 필라테스나 발레 같은 운동을 왜 강박적으로 꾸준히 하는지 알 것 같다.
네 번째 반응, 다 같이 재택근무가 처음인 탓에 우리 모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나도, 동료들도, 부장님도 일단 무조건 하라니까 하는 재택근무가 당황스럽다. 일단 우여곡절 끝에 집에서 업무 환경에 접속하면 어찌어찌 업무를 시작하는데, 일단 대면 업무가 불가능하니 주로 사내 메신저와 전화 통화를 이용한다. 재택근무가 상시화 된다면 분명 화상회의가 보편화될 테지만 아직은 주 1회 정도 돌아가며 재택근무를 하는 상황이라 메신저와 전화로 커버가 가능하다.
대신 불필요한 스트레스가 생겼다. 사무실에서는 메신저 대답이 없으면 회의 하나보다 하는데, 재택근무를 하니 따박 따박 메신저에 응답하지 않으면 혹여 자리를 비운 게 아닐까(= 얘가 노나?) 하는 생각을 할까 봐 오히려 메신저 창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넵, 넵, 저 여기 있어요, 하며 즉각 대답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회의 중이면 스마트폰에 자동 설정된 '회의 중입니다. 잠시 후 전화드리겠습니다' 메시지를 남기는 게 당연했는데, 재택근무를 하니 '부재중 전화 = 아니 얘가 뭐하느라 전화를 안 받아'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물론 내가 오버하는 걸 수도 있지만 이 불편한 신경 쓰임은 재택근무 초반에 다들 느끼는 듯했다.
재택근무 2주차 두 번째 날, 고작 두 번째인데 뭔가 첫날보다 훨씬 적응이 된 느낌이다. 일주일 사이 재택근무 시스템도 많이 안정화되어 첫날 접속까지 45분 걸리던 시간이 5분으로 단축됐다. 5분 만에 출근하여 내 방 책상에서 부장님께 메신저로 '저 출근했어요' 하고 나니 재택근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집에 있으니 일하면서도 일하는 게 맞나 우왕좌왕하던 첫날과 달리, 오늘은 급한 보고서 작성 업무 때문에 정신없이 오전 시간이 지나갔다.
사무실에서도 다들 점심 먹으러 나갔을 시간, 오늘은 어영부영 집에서 혼밥으로 대충 때우지 않으리, 결심하고 동네 맛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때마침 제주도에서 막 올라와 집에 가는 길 우리 동네에 들르기로 한 친한 언니와 점심 약속을 잡았다. 평일 점심에 이런 약속이라니 뭔가 재택근무자만이 누릴 수 있는 꿀 같은 시간이다. 디지털 노마드나 프리랜서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 밖을 나가니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한산할 줄만 알았는데 우리 동네에 이렇게 회사가 많았나? 평일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러 나온 직장인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매일 출퇴근하던 길인데 평일 점심시간이라니 생경한 풍경이다. 동네에 베트남 음식 맛집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운 좋게 마지막 테이블 자리를 잡았다. 제주도에서부터 캐리어를 끌고 도착한 언니와 밥을 먹고 핸드 드립으로 유명한 동네 카페의 테라스 자리에 앉았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고 있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동네 마실 나온 사람처럼 앉아서 직장 동료가 아닌 언니와 수다를 떨고 있으니 위너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는 사이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가는 직장인들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하는데 탄성처럼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 집에 가기 싫다!"
이 무슨 말?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커피 한잔 마시고 사무실에 들어갈 때쯤 매일 하던 소리가 "아, 집에 가고 싶다"였다. 날씨도 좋은데 이대로 집에 갔으면 좋겠네, 하며 터덜 터덜 사무실로 걸어가던 내 입에서 튀어나온 집에 가기 싫다는 소리.
왜 집에 가기가 싫지? 아, 나 지금 재택근무 중이지! 집이 집이 아니구나, 집이 회사구나! 일하러 가는 거구나!
머릿속에서 돌아가야 할 집을 떠올리는 순간, 회사 업무망과 연결된 노트북이 놓여 있는 내 방 책상이 떠오르는 순간 본능적으로(?) 집에 가기 싫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잠시나마 달콤했던 재택근무의 환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제대로 현타가 왔다.
일은 일이다.
사무실에서 하든 집에서 하든. 요즘은 또 재택근무 확산으로 호텔에서 일하기 같은 게 유행이고, 심지어 도심의 호텔에서는 오전/오후 시간 재택근무 패키지 같은 상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그런 패키지 상품 후기를 보면 호텔은 역시 여행이나 놀러 와야 한다며, 체크인하고 노트북을 켜는 순간 현타가 온다는 후기가 많다. 오늘 점심시간 내가 느낀 현타와 유사한 결이다.
'Work-Life Balance' 워라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워라밸이 잘 지켜지는 회사, 유연근무나 재택근무가 활성화된 회사가 좋은 회사는 맞다. 그런데 그게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을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로 만드는 것이다. 일이 좋으면 알아서 야근을 한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이 꼰대 소리인 줄만 알았는데, 본질은 다르지 않다. 좋은 회사의 본질은 '몰입'과 '자율성'이고, 결국 이 두 가지를 높이기 위해 기업은 여러 제도를 만들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재택근무 2주차, 더 했다간 영영 집에 들어가기 싫어질 것 같은 현타를 맞긴 했지만, ‘워라밸'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새롭게 다가온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