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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Apr 11. 2021

밥벌이

십 년을 일하니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폭설이 내리는 날이면 아직도 십 년도 더 된 입사 교육 첫날이 떠오른다. 내 기억에 그날 서울은 백 년 만의 폭설을 기록했는데, 입사 교육의 첫 프로그램은 컴퍼니 투어였다. 말 그대로 서울 전역과 경기도까지 회사 곳곳의 사업장을 돌아다니는 것.


기상 관측 이래 최대급 폭설 + 새벽에 발이 푹 빠지게 쌓인 눈 + 펑펑 내리는 눈 ing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에, 뉴스에서는 서울 교통마비 속보가 계속되고 있었기에 당연히 지극히 상식적인 투어 취소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출근을 했고 투어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기적에 가까운 일정으로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그날 나는 깨달았다.


와 회사는 이런 곳이구나, 학교였음 자체 휴강인데.


백 년 만의 폭설 속에서도 할 일을 해야 하는 곳, 상식을 뒤엎는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5분에 한 번씩 이슈 사항을 체크하며 일정을 조정하며 끝끝내는 컴퍼니 투어를 끝마친 담당 차장님 과장님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엄청나게 막히는 투어 버스 안에서 밥벌이의 위대함과 서글픔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직장 생활 십 년을 넘고 그때 그 과장님 연차가 되어 돌이켜보니, 그 많은 신입사원들을 불러 모아 일정을 하나하나 어레인지하며 투어 프로그램을 짜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였어도


‘다시는 못해, 두 번은 없어! 무조건 오늘 끝내야 돼!’


하는 마음이 기적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천재지변 같은 날씨에 누굴 탓할 수도 없는 깊은 빡침이 만든 기적.


아직 회사에 계시려나. 요즘 이름도 가물가물 십 년도 더 된 그 날의 과장님이 떠오른다. 햇병아리 신입사원이던 내가 과장이 되었고, '밥벌이의 위엄과 위험'에 대한 한 권의 책을 썼다는 사실을 혹시 알고는 계실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최근, 예전에 함께 일했던 CEO가 계열사의 더 큰 조직으로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들 파격적인 인사라고 했지만 내 기억 속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CEO의 모습만은 생생하다. 어디서든 잘 해낼 것 같은 리더의 모습.


아무튼 그 덕에 최근 CEO와 함께 일하게 된 직원들로부터 전화를 자주 받고 있다. 우리 회사에 계실 때의 사례를 물어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 CEO가 우리 회사에 재직 시절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한다. 아, 그래요? 하면서 나에겐 몇 년 전 그 CEO와 일했던 여러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그때 나 참 많이 성장했구나.


사실 직장 생활의 기억은 쉽게 미화되는지라 대부분 '힘들었지만 보람있었다'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CEO와 일했던 시간은 '힘들었지만 보람있었다'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버텼을까 신기할 지경인데 그 시간들 속에서 내가 했던 일과 생각, 시행착오와 나름의 성과를 덤덤하게 누군가에게 정리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든 생각이었다.


직장 생활에서 성장이라니 사치 아닌가 싶을 만큼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요즘이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싶고, '벼락 거지'라는 말처럼 노동 소득의 가치는 한없이 낮아지는 것만 같고, 이제 몇 년 안 남은 삼십 대에 경제적 자유를 달성한 파이어족의 이야기가 유튜브 피드에 가득한 요즘, 밥벌이가 유독 지긋지긋한 요즘이었다.


그래도 좋았다가 싫었다가, 괜찮았다가 그만두고 싶었다가 아슬아슬 십 년 넘게 지속해온 밥벌이 속에서 보람과 의미를 찾고 배움과 성장이 있었다. 남들이 벼락 거지라고 내 밥벌이의 가치를 한없이 깎아내려도 미련하게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훈 선생님이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도, 아무 도리도 없지만 꾸역꾸역 밥을 벌자고 한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십 년을 일하고 나니 이제야 조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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