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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Apr 11. 2021

감사

내 인생이 내 마음에 듭니다



설날 아침 제사를 지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마다 절을 하며 (사실 조금 무념무상) 늘 되뇌었던 말이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올 한 해도 잘 보살펴 주세요. 지켜주세요. 우리 가족 다 건강하게 해 주세요.


좀 더 어렸을 때는 주일 미사도 안 가면서 천주교 모태 신앙인 내가 이런 걸 빌어도 되나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다고 또 제사에 엄청난 의미를 두는 유교 집안도 아니었기에 알 수 없는 혼종 상태에서 그렇다고 뭐 딱히 복잡한 마음도 아니고, 그저 할머니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는 마음으로 저렇게 바람을 되뇌곤 했다.


아마도 제사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지내 왔겠지만, 기도와 같이 무언가를 빌고 바라는 일을 알게 된 어린 시절부터였던 것 같다.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이제 정말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족의 제사를 지내게 되면서부터. 항상 술잔을 향 위에 세 번 돌리며, 잔을 올리며, 두 번 절을 하며 늘 빌었다.



잘 되게 해 주세요. 보살펴 주세요, 지켜 주세요.



그런데 올해의 설 제사를 지내는데 처음으로 이런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할머니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정말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제사상을 앞에 두고 감사하다는 말이 나온 건.


나는 정말로 그 순간 모든 것이 감사했다. 내 삶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것도 없고, 그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명절이었음에도 거의 삼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감사하다는 말이 마음속에서 나도 모르게 감탄처럼 튀어나왔다.


왜일까.


가장 최근에 제사를 지냈던 지난 추석과 지금의 설 명절을 비교해 보자면 무엇이 달라졌길래 나는 이렇게 더 바랄 것도 없이 그저 감사한 마음이 들었을까.


생각해보면 제일 큰 변화는 1년 넘게 쓴 글을 엮어 내 이름으로 출간한 책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지난 해 태어나 설 연휴 끝나고 첫 돌을 앞둔 조카는 건강하게 자랐다. 큰 불행도 작은 불행도 없어 감사하고, 무엇보다 지금의 내 삶이 내 마음에 든다. 늘 새로운 바람과 결핍 속에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시간도 있었고, 남의 마음에 들고 싶어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도 있었다.     


그런데 해방처럼 요즘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이 이거다. 나는 지금의 내 삶이 마음에 든다는 것. 누가 뭐래도 그 누구의 마음보다 내 마음에 든다는 것.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며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온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해전 돌아가신 황현산 선생님께서, 살면서 제일 황당한 것은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라고 하셨다. 준비만 하다가 갑자기 늙어버렸다고 하셨는데, 영영 어른이 되지 못하더라도 괜찮을  같다. 이렇게 나이를 먹어도 계속 '태어나서 처음' 맞는 순간이 있다면.  인생이 점점   마음에 들어간다면.  되게  주세요, 하는 바람보다 그저 탄성처럼 감사합니다, 하는 순간이 많아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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