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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Dec 26. 2019

입사 10주년, 로또는 되지 않았지만

부끄럽지 않은 좋은 어른으로 늙어 갔으면


이제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새해도 보통의 날처럼 덤덤한 나이가 되었는데, 유독 입사 10주년이 되는 날만은 유난스럽게 많은 상상을 했었다. 물론 지난 글에서 쓴 것처럼, 사직서를 품에 넣고 다니는 사람처럼 회사와 아름다운 이별을 하는 막연한 상상도 수없이 했다.


입사 10주년이 되는 날 꼭 다 같이 모이자며 1년 전부터 동기 모임을 하기로 약속을 해 두었었는데, 그 날이 토요일이었다. 하루 전날인 금요일에는 덤덤히 퇴근을 했고,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연말 불금에 약속도 잡지 않고 조용히 집에 왔다. (괜히 혼자 숙연)


밤 12시 땡 하는 순간, 입사 동기 카톡방에 사진 두 장이 올라왔다. 센스 넘치는 동기 중 한 명이 정말 딱 10주년이 되는 순간에 맞춰 입사 연수에 들어간 날 찍은 사진을 보냈다. 딱 10년 전 우리들의 모습. 차마 어디 공개할 수 조차 없는 지금은 절대 안 입는 검은 정장을 어색하게 차려입고, 파이팅 넘치는 플래카드 아래 활짝 웃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한없이 어리고 한없이 촌스러웠다.


며칠 전, 지금 연수 중인 신입 직원들에게 강의를 할 일이 있었는데, 왜 연수 때 나누어 주는 옷은 변하지도 않는지. 어색한 단체복을 입고 대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신입 직원들의 모습이 너무 풋풋하면서도 어딘가 좋은 말만 많이 해주고 싶은(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나이 많은 선배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입사 10주년 기념 동기 모임날, 이젠 재직 중인 동기보다 퇴사한 동기가 훨씬 많고, 이직한 회사도 어찌나 다양한지 10년 전엔 비슷비슷했던 커리어도 관심사도 이젠 제각각이다. 프로젝트 때문에 주말에도 일하는 동기, 내일 소개팅을 하기로 한 동기부터 아들 셋 중 첫째가 독감에 걸려 집안에 강제 격리되는 바람에 모임에 못 나온 동기까지.


우리는 이렇게 딱 10년 전 같은 선에서 출발하여 이젠 너무도 다른 각자의 생애 주기를 지나고 있다.


10년 전 사회 초년생 시절의 추억 이야기를 지나 은퇴 후의 삶 걱정까지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다 헤어져 돌아오는 길, 동기들이 각자 어느 자리에 있든 종종 소식을 전하며, 어른이 되면 하는 일인 줄 알았던 '경조사 챙기기'  같은, 기쁜 일이나 마음 아픈 일은 함께 하며 그렇게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좋은 어른으로 늙어 갔으면.





동기 모임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입사 10주년 기념으로 산 로또 번호를 맞춰 보았다. 낙첨.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잠들었는데, 회사에서 요즘 고민하고 있는 업무에 관한 꿈을 잔뜩 꾸었다. 악몽인가. 입사 10주년이 되는 날 회사 꿈을 꾸다니 문득 웃음이 났다.


이렇게 나는 입사 10주년을 맞이하여 퇴사도 하지 못했고, 로또 당첨도 되지 않았지만, 회사 업무 꿈을 잔뜩 꾸고 나서도 피식 웃어넘길 만큼의 멘탈은 장착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새로운 꿈을 꾸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매주 로또도 살 것이며, (다니는 동안은) 회사 일도 (그럭저럭) 잘 해내는 직장인으로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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