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한 갑을관계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원사업자(혹은 발주자)와 수급사업자의 하도급관계, 본사와 대리점의 관계, 가맹본부와 가맹점의 관계, 대형유통업자와 납품업자 혹은 입점업체 관계와 같이 전통적으로 우월적 지위 남용이라고 부르는 행위로부터 최근에 벌어진 항공사의 땅콩회항, 라면상무, 백화점모녀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젠 이러한 갑의 행위를 ‘갑질’이라 부르고,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 언론이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일반화 되었다.
그럼에도 갑을관계의 개념조차 학문적 혹은 사전적으로 정확하게 정의된 것은 아직 없는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구매하는 측을 갑이라고도 생각하지만, 오히려 대리점이나 가맹사업의 경우를 보면 을이 갑의 상품을 구매하는 관계이다. 따라서 보통 원사업자나 본사, 가맹본부, 대형유통업자들이 거래상대방들에 비해 자산이나 매출액 규모가 크거나 사업자 수가 적은 점을 볼 때 대략 기업 규모나 경쟁 상대방의 수가 갑을관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갑을관계 내지 갑질이 갑의 이익을 위해 부당하게 을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로 보는 경향이 있고, 을의 상당수가 갑질로 인해 피해를 당하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갑을관계를 단절하는 비용이 갑보다 을에게 큰 경우가 많아서 을은 어쩔수 없이 갑의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고 갑은 이익을 얻은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길게 보면 그러한 갑의 행동은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을 가운데 일부는 결국 갑과의 거래관계를 단절하게 되고, 갑이 다른 거래상대방을 찾을 수 있겠지만 새로이 갑의 거래상대방이 될 을들은 갑질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거나 갑 외에는 거래할 기회를 찾을 수 없는 경쟁력이 없는 을들로 제한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어도 요즘 우리 경제 전반에서 문제되고 있는 갑을관계 혹은 갑질이 갑에게 이익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왜 갑질이 일어나는 것일까?
첫째는 을의 실수나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거래관행으로 인해 일방적이고 불평등한 계약이 맺어지고 을이 예측하기 어려운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생긴다. 따라서 그러한 계약관행을 바로잡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로인해 을이 반드시 이익을 본다는 보장은 없다. 경쟁시장에서 다른 거래조건이 을에게 유리해진다면 가격적인 요소는 을에게 불리하게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갑질이라고 한꺼번에 부르지만 어떤 것들은 을의 선택에 의해 불리한 계약조건과 좀 나은 납품가격을 거래한 경우도 존재하며, 을이 우선 납품이나 대리점이나 가맹점 따내야겠다는 생각에만 집중해 계약조건은 제대로 검토하지 못한 경우도 존재한다.
둘째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갑질은 갑의 경영실패로 인한 경우가 많다. 얼마전 원자력 안전을 위협한 한수원(한전 자회사)의 납품비리가 한수원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경영권의 양도로까지 이어진 남영유업의 갑질 역시 남양유업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대중소기업 간의 갑을관계도 대기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대기업 경영실패로 인해 대기업 임직원이 회사이익으로 돌려야 할 부분을 갑질로 사유화한 측면이 크다. 갑을관계 문제는 대기업에게도 손실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일방적 거래 단절이나 밀어내기 위험은 결국 납품단가의 인상이나 대리점 마진의 인상을 통해 대기업 자신에게 돌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남양유업 직원의 막말이나 땅콩회항이 상대방안 을에게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보면 그로인해 갑의 회사는 엄청난 손해를 입었고, 달리 생각해 보면 회사 이익을 위해 쓰일 자원을 임직원이 개인의 화풀이로 바꿔버린 셈이다. 왜냐하면 갑의 대리점이든 혹은 부하직원이든 영업환경이나 근무환경이 좋았다면 갑의 회사 이익을 위해 훨씬 열심히 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갑질이 발생하는 원인은 역설적으로 을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 때문일 수도 있다. 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주장인가 하겠지만, 백화점이나 홈쇼핑(이른바 “갑”)의 판매수수료가 너무 높다는 이유로 통제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을(백화점 입점업체나 홈쇼핑 납품업체)들의 입장에서 판매수수료를 지불하는 이유는 백화점이나 홈쇼핑에서 판매하는 경우 다른 곳에서보다 더 비싸게 혹은 더 많이 팔수 있어서 그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수수료를 통제한다면 이미 입점했거나 납품 중인 업체는 수수료가 낮아져서 이익을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업체들은 기회를 얻기 위해 줄을 대야 하는 일이 생길 것이고, 또한 갑은 규제로 인해 수수료를 많이 받지 못할 바에는 연고가 있거나 로비 잘하는 업체를 선택하거나 수수료 외의 다른 이익을 갑에게 제공하도록 강요할 수도 있다. 혹은 그런 이익이 있기 때문에 거래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어떤 갑질도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즉 을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가 오히려 갑을관계의 불공정성을 더 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갑질 또는 갑을관계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에 앞서 규제 만능의 대책을 낼 경우 오히려 을들은 더 심한 갑질의 횡포에 시달릴 우려가 있다.
이글은 2015년 유통전문지 넥스트이코노미에 게재한 글(http://www.next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903)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