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쉽지 않다

통화에 통화에 통화

by 진명

'전화공포증'이라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대부분 이해가 안 되시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저는 낯선 사람, 중요한 이야기를 전달하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통화에서 종종 그런 감정을 느낍니다. 가급적 피하고 싶어지는 이 감정이 도무지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국가대표 가수 아이유도 '전화공포증'을 앓고 있다니 조금 안심(?)되는 기분입니다. 수만 명이 운집한 무대에서 노래하는 그녀도 가지고 있는 증상이라는데 하물며 나 나부랭이가 경증의 전화공포증 정도 있는 거야 뭐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https://www.sedaily.com/NewsView/29O693Z7ZF

열여덟 어른 카페 운영자님과의 통화를 위해 이야기할 내용은 미리 글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나의 마음과 취지, 방법이 가급적 오해 없이 그리고 빠짐없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정리해 두고 그걸 컴퓨터에 띄워 놓은 채로 통화했습니다. 예전 회사에 다닐 때 일과시간 중 일종의 아웃바운드 전화영업을 잠깐씩 해야 했는데요. 아무것도 없이 통화하자니 너무너무(X10) 힘들어서 그때부터 전화공포증 도지려고 하면 미리 대본 비스무리한 걸 작성해 두곤 했습니다. 마치 콜센터 직원분들처럼요. 내용을 글로 정리해 두고 눈앞에 두지 않으면 말도 빨라지고 호흡도 가빠지고 내용도 오락가락 하여간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깁니다. 저는 아무래도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 같습니다.




운영자님과는 간단히 메시지를 주고받아 편하게 통화가능한 시간을 서로 확인하고 전화를 겁니다. 통화가 바로 안 되는 걸 보니 뭘 하시나 보다 하고 내 할 일을 합니다. 두어 시간 후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기 너머에는 명랑한 목소리의 여성분이 계십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5569761

최근 자신의 이야기를 저서로 출간한 허진이 작가님이라고 합니다. 요즘 이북리더기만 끼고 사는 데다 이북이 저자한테 인세도 많이 간다고 해 가급적 이북으로 주문하고 싶은데 아직은 종이책만 있습니다. 조금 더 기다렸다 이북이 안 나오면 종이책으로 사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종이책은 저자 사인을 받을 수 있으니 그것도 좋겠네요. 종이책과 전자책 두 개 다 사죠 뭐. 열여덟 어른 유튜브 채널에는 인터뷰 영상이 많아 허진이 작가님은 이미 여러 영상을 통해 내게 낯이 익은 분이었습니다. 20대 중후반쯤 되셨겠네 시집을 일찍 가셨나 했지만 웬걸 서른이 훌쩍 넘었다는 이야기에 무척 놀랐습니다.


통화는 20여분 남짓. 작가님은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시고 현실적인 이유로 어떤 것들이 어려운지 다른 방법은 있는지 하나씩 답해주셨습니다. 의외로 내가 사는 서울 서대문구에는 자립체험주택이라고 자립준비청년들이 잠시 기거할 수 있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서대문구는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신경을 좀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211241155001


소이프의 치어빌더라는 것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소이프는 자립준비청년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설립된 사회적 기업인 디자인 회사입니다. 이곳에서 친구들을 돕는 '치어빌더'라는 제도를 운영 중이고, 허들링 커뮤니티라고 해서 함께 이런저런 활동들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작가님은 마침 치어빌더를 모집 중이라고 하니 알아보시라고 해 반가운 마음에 살펴봤지만 6개월 후원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신청자격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아마 친구들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갖추고 신청하라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일단 어떤 회사인지 잘 모르니 조금 더 살펴보고 후원부터 시작해 볼지 결정해 보려고 합니다.


통화 말미에 이르러 실제로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당장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몰려왔습니다. 시작이 진짜 어려운 거구나 싶은 생각. 답답하고 아쉬운 마음에 통화를 끊기 전 작가님, 제가 뭔가 돕고 싶어요. 혹시 작가님에게 필요하신 게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작가님은 이제 나이도 찼고 본인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순간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어느 누가 생전 처음 보는 (실제로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내가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이걸 도와주세요 할 수 있을까요? 돕고 싶은 마음은 앞서는데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머리에 있는 생각이 필터도 거치지 않고 입으로 툭 나온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 시작하시든 신뢰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작가님의 이야기를 글을 쓰는 지금 다시 한번 떠올려 봅니다.


처음에는 관계를 맺지 않고 서로 간의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무언가 기여하는 방식이었으면 했습니다. 그 편이 서로 깔끔할 수 있거든요. 그런 방향으로만 생각했더니 지난 수년간 아무것도 한 게 없었어요. 결국 대면해서 관계를 맺는 형태든 어떤 행태든 상관없다는 입장으로 방향을 전환해 이리저리 알아는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이렇게 '신뢰'라는 문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자립전담기관은 용산에 있습니다. 작가님도 이곳에 알아보시면 좋을 거라 이야기해 주셨고 메일은 이미 보내둔 상태에서 회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3일이 지나도 회신은 없었고 어쩌면 회신이 아예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싶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관련하여 대화를 나눌 담당자와는 통화가 안되었고 여차저차 그다음 날 자립협력총괄팀장님과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구상했던 멘토링클럽은 당연히 기관에서도 여러 번 진행했었다고 합니다만 친구들이 바빠 그간 유의미하게 운영이 잘 안 되는 편이었고 기본적으로 친구들은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시락 사업도 많이 해봤는데 잘 안 먹고 썩힌다고 하네요. 공부와 생계에 치여 늘 바쁘다 보니 뭘 더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고된 육체노동을 하며 당장 쓸 생활비는 겨우 충당하지만 거기서 뭘 더 꿈꾸거나 할 체력도 시간도 없었던 나의 20대가 기억납니다. 아마 친구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는 기술이나 경험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아 결국 소중한 젊음을 꿈과 희망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생계에 저당 잡혀 스스로 갉아먹기 쉽습니다. 그 와중에도 그 시간의 경험과 기술을 모으고 연마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아마 극소수일 겁니다.

사실 그래서 사회적 기업을 만드는 것이 또 그런 기업들이 많아지는 것이 궁극적으로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당장은 나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 앞가림부터 잘해야겠다 다짐해 봅니다. 결국 시설을 직접 알아보는 쪽이 현실적으로 당장 무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서울시아동복지협회로 검색하니 지역별 시설이 검색됩니다. 몇 곳을 리스트업 하고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 찾아갈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봉사가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할 분을 환영"한다는 소이프의 치어빌더 신청 홍보 웹자보의 문구에 생각이 많아집니다. 나눔이니 봉사니 그런 것보다 그저 마음 가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태도가 친구들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건강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군요. 역시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습니다. 어차피 한두해 할 일 아니니 긴 호흡으로 어린 친구들과 차근히 좋은 관계를 맺어가는 것부터 해봐야겠습니다. 시설에서 친구들을 돌보는 분들과도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누고 그분들의 일을 거드는 쪽으로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적용해 봐야죠. 다음 글은 아마 어떤 시설에 찾아가야 할지, 그곳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이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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